작가들의 글/전혜린

새로운 사랑의 뜻 (배경음악/Bernardo Sandoval - Como Olas)

고독한낙서 2009. 1. 14. 01:27

바하만의 <만하탄의 선신> 속에 있어서의 사랑의 문제

영적 체험의 안테나로서의 독일 현대시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현대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시의 특징이 우리 시대의 다이나믹에 의해서 뒤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도피하고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동경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상과 생과 감정의 완전한 변화를 알고 있는 이 현대시는 새로운 인식-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의 변화, 자연 과학에 의한 자연과 세계의 분리, 기술과 기계에 의해서 개인적 개성적인 것이 발하는 위협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현대시의 일부는 트라클 하임 등이 시초한 표현주의의 길을 가고 일부는 전연 새로운 길을 간다. 이 현대시의 핵심은 자아와 다각적인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의해서 복잡한 현실 개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 따라서 현대시 속에서는 르네상스 예술관과, 고전시의 기초가 되어 있는 단순하고 일의적인 주체 객체의 관계가 지양되거나 또는 근본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즉 자아와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이미 규정적인 것이 못 된다. 따라서 현대시는 보수적인 시보다 문제성을 많이 가졌고 진짜와 가짜, 연속적인 것과 유행적인 것을 가르기가 매우 어렵다. 다음에 나는 전후 독일 시인 중에서 특히 연속적인 가치를 가진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여류 작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최신작에 관해서 써 보기로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빈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여류 시인인 바하만의 시는 릴케 등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신낭만파에 접근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몇 개의 시집 외에 지금 취급하려는 방송 시극 <만하탄의 선신>-1958년 5월에 방송, 9월에 출판-이 있다.
이 방송극은 전후 독일 문학에 있어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의 일부며 또한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뚜렷하게 대답을 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만하탄의 선신>은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뚜렷한 정의의 시도로 전후 독일 문학에서 별로 중시되고 있지 않은 테마인 사랑을 취급한 점에서도 또한 특별한 주목이 요구되는 작품이다.

뉴욕 여대생인 제니퍼는 여행 중에 있는 구라파인 얀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죽기로 결심했으나 얀이 잠깐 바람 쏘이러 나간 도중에 혼자 죽고 만다.
그것을 선신과 법관이 대담적으로 재판하는 형식으로 '어디서나 다시 시작되는' '미소와 함께 일어나는' 카오스인 사랑을, 질서를 망치는 불가능한 무엇으로써 부정하는 것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사랑은 이 극 속에서는 커다란 포기의 모험, 즉 현실과의 접촉의 포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 사회 질서 내에서의 생활의 포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강제되는 자기 자신의 개성의 발전과 완성에 대한 포기, 그리고 끝에는 생 자체의 포기로써 표현되어 있다.
사랑은 일종의 영구적 예외의 상태이며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또 자기 자신에 대한 또 자기들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쟁 상태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고의 행복은 개성의 발휘가 아니라 상실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밖에는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과 너에게 새로운 언어로 이야기 하겠다는 것과 내가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종사할 수 없으며 결코 소용되는 인간이 될 수 없으며 모든 것과 끊겠다는 것과 다른 모든 것과 헤어지겠다는 것밖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일각 일각 세계 밖으로 밀려 나간다.
'너의 편이고 모든 것에 반대해서 반대 시대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정열의 불에 몸을 태운 사람에게는 온갖 자유는 내재 속에 떨어져 버리고 죽음만이 해결의 길이 된다.
그들은 큰 걸음으로 세계에서 멀리 떨어지고 온갖 현실적인 것과의 교섭을 거부하고 사회에 있어서, 세계에 있어서 자기의 지위를 만들 것을 포기하는 단념자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후에 의사한테 걸린 어린 시절의 여동무, 또 이미 다섯 명의 아이를 가진 시골의 이웃.'

즉 타협하는 사람만이 '창조 이전과 같은 카오스인 사랑의 신비'에 상처 입지 않는다. 즉 그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이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이 세상의 인습에 의해서 지지되고 오래 살 수가 있다.
그러나 무서운 사랑의 정열에 몸을 태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서로가 자기의 초월을 상대방에게 맡겨 버리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영원화 하려는 무모한 의도를 갖는다.

이것은 여자에게 있어서의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통 여자의 사랑의 이상은 완전한 자기 포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융해되어서 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사랑이라는 말 밑에서 이해하는 것은 완전한 헌신, 육체와 영혼의 전혀 고려도 보류도 없이 하는 헌신이다'라고 니체도 말하고 있다. 즉 역사와 생활 상황이 우월한 존재보다 완성된 존재라고 끊임없이 가르쳐 준 남성이라는 존재 속에 (이에 관해서는 시몬 드 보봐르의 이론이 있다 : 제2의 성) 여자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하고 융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남자에게 있어서는 사랑이란 인생 그 자체일 수는 없고 다만 많은 가치 속의 한 가치에 불과한 것이며 남자는 여자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고 반대로 자기의 실존 속에 여자를 일체화하고 부속시키려고 할 뿐이다. 즉 행동에 의해서 실현하는 본질적 주체적 존재로서의 남자는 사랑에 의해서 세계 포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행동을 확대하려고 노력할 수가 없다. '여자는 자신을 내던지고 남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라고 니체가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뜻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남자가 여자와 똑같이 자기 포기의 의욕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에 옮긴다면 그 사랑은 순간적인 것이 아닌 다음에는 타협성을 잃고 만다.
즉 여자는 남자가 완전히 자기에게 속해 있고 사랑에 속해 있기를 원하나 그와 동시에 자기의 초월을 맡긴 남자 속에서 자기가 포기한 세계 속에서만 온갖 기획과 행동과 성공을 기대한다.
즉 자기에게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에 속한 것(즉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요구한다. 마치 신에서와 같이...... 이 요구는 전체적으로 이미 무리한 것이다. 따라서 보들레르도 그의 <여행에의 초대>에서 '사랑하면서 죽자!'라고 노래했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신화의 진리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생활의 서서한 파괴 작용과 둘만의 권태에 의해서 죽이느냐 또는 사랑을 지닌 채 죽느냐의 양자 택일 밖에는 남겨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지상과 피안의 양자 택일인 것이다. 제니퍼와 얀은 사랑을 살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인디아나어로 '천국과도 같은 지상'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만하탄의 30층 위에서 피안으로의 모험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얀은 주저를 느낀다.
지상의 질서가 그에게 팔을 내민 것이다. '결정이 된 이후에 갑자기 그는 혼자 있고 싶어졌다. 30분 만 혼자서 조용히 앉아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는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질서가 일순간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는 저녁 먹기 전에 한 잔의 술을 혼자서 마시고 애인의 속삭임을 귀에서, 애인의 체취를 코에서 쫓아버린, 또 눈이 검은 활자에 의해서 다시 생기를 띠는 남자와도 같이 정상적이고 건전하고 정당했다.

고독한 결단의 시간 속에서 제니퍼는 자기와 얀을 이와 같은 정열 속에서도 떼어 놓고 있는 거리...... 실존으로서의 차이를 깨닫고 절망하고 사랑 속에서 자기를 성취하려는 여자의 본능적 충동에 의해서 혼자서 죽는다. '그는 구제되었다. 지상은 그를 다시 가졌다.'
'나날의 질서'와 '위대한 인습'의 수호신인 선신은 괴테적 문체의 <파우스트> 일부에서 메피스토가 '그의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하는 말에 대해 천상으로부터 그는 구제되었다고 말하는 정반대의 내용을 가진 말을 한다.

다시는 순수한 초월의 행위의 순간도 없이 그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기대도 없이 오래오래 살 것이다.

전후의 신 독일 문학의 테마는 모두 존재론적 질서의 탐구와 생과 세계의 의식의 탐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반하여 바하만이 초시대적인 테마인 사랑을 취급하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며, 또한 간결하고 상징적인 다이얼로그를 통해서 왜 지상에는 사랑이 불가능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은 경탄할 만하다. 즉 바하만의 시도는 20세기에서 애인이라는 우화의 시도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었으나 얀은 살아 남는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제한되고 조건지어져 있는 남녀간 생의 상황의 자각의 반영인 것이다. 여기서 바하만의 현대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구라파적 시어로 쓰인 매우 릴케적인 바하만의 문체는 거의 세계적 완성을 지니고 있고 바하만은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요즘 독일에서 몹시 높이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