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전혜린 6

몽환적 10월 / 전혜린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새로운 사랑의 뜻 (배경음악/Bernardo Sandoval - Como Olas)

바하만의 속에 있어서의 사랑의 문제 영적 체험의 안테나로서의 독일 현대시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현대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시의 특징이 우리 시대의 다이나믹에 의해서 뒤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도피하고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동경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상과 생과 감정의 완전한 변화를 알고 있는 이 현대시는 새로운 인식-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의 변화, 자연 과학에 의한 자연과 세계의 분리, 기술과 기계에 의해서 개인적 개성적인 것이 발하는 위협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현대시의 일부는 트라클 하임 등이 시초한 표현주의의 길을 가고 일부는 전연 새로운 길을 간다. 이 현대시의 핵심은 자아와 다각적인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의해서 복..

일기로부터의 단상 (배경음악/David Pena Dorantes - Orobroy)

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 1964. 1. 18.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소시민적 일요일 ― 1964. 1. 19. 권태와 어느 안정감 ― 소시민성 속에 자기를 고정시키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 빈 공허감이 내 가슴을 찬 바람 불 듯 지나간다. 감정도 애증도 다 멀어진 느낌. 가정, 직장, 나, 국가, 사회...... 이런 단어들이 아무 연결도 없이 내 머리를 지나갔다. 시간의 풍화 작용― 1964. 1. 19.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배경음악/Alex Britti - Immagini)

"사랑만이 우리를 온갖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유일한 요새다" 많은 사랑을 적당한 방법으로 받고 자라난 사람만이 정상적인 정서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부드러운 풍요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생래(生來)의 두 가지 본능이 있다. 하나는 타인 또는 사회로부터 자기(또는 자기의 재능, 기타 어떤 형태의 현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충동이고 또 하나는 남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본능은 몹시도 강하게 우리에게 집착하는 내면적 욕구이다. 순탄하게 정상적이고 절도 있는 범위 내에서 풍요하고 만족스럽게 사랑을 받고 자라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 이상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위..

죽음에 관하여 (배경음악/Abdullah Ibrahim - Eleventh Hour)

토무라 조[藤村操]의 ≪번민기(煩悶記)≫에 부쳐 집착 ― 어는 사항이나 인간이나 생명에 밀착해 있는 상태는 객관적인 눈으로 볼 때 때로는 취한 느낌, 숨막히는 압박감을 우리에게 준다. 영원히 안 팔릴 열쇠의 꾸러미를 방탄 조끼처럼 걸치고 팔러 다니는 노인, 내일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 확실한 회색 생활을 지속하고 잇는 수많은 생활인들. 내일 지구가 파괴된다는 것을 통고 받는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다만 아연히 입을 열고 앙천 탄식(仰天嘆息) 할 뿐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 ― 우리의 대분분이 그 중에 들어가는 ― 에게는 죽음이란 다만 우연한 불상사 이외의 다른 의의를 갖고 있지 않다. 일회적인 생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비한 끝인 죽음이 이렇게 등한시되엇 될 일인가는 한번 고려해 볼 ..

마지막 편지(遺稿) (배경음악/ 기다림의 테마 (O.S.T - 산책)

장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이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Ich li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