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57

저녁의 시 구석/실천문학사/정윤철

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 한낮의 겨운 수고와 비린 수성들도 잠시 내려두고 욕망의 시침질로 기운 주머니 속의 지갑도 찔러두고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때 돌아와 저마다의 창에 하나씩 그러면 거기, 사람들의 마을에는 멀리서도 깜빡이는 환한 물감 방울이 번지기도 한다 그렇게 식구들의 정다움 속으로 방심과도 같은 마음의 등을 내려놓기라도 하면 머리 위의 하늘에선 지상에서의 계급장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별들의 수런거림이 일렁이기도 하는 때 저녁이 오면 저녁이 오면 어디선가 집집의 처마이거나 이마 위를 어루만지며 스스럼없는 바람의 숨결 같은 것이 느려진 시간의 긴한 뒷등을 스치며 지나가기도 한다.

김윤배/바람의 등을 보았다.

모든 지명은 바람의 영토였다 한 지명이 쓸쓸한 모습으로 낡아가거나 새롭게 태어난다 하더라도 세상의 지명은 바람의 품 안에 있었다 지명은 바람의 방향으로 생명의 길을 갔다 바람이 가고 싶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바람의 등 이였다 바람의 등은 바람의 영토가 아니였다 몸 이였다 몸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바람의 등은 온갖 지명에 긁혀 상처 투성이였다 바람의 등은 상처 아무는 신음 소리로 퍼덕인다 나는 내 등을 보지 못했다 등은 쓸쓸히 낡아 갈것이고 홀로 불 밝혀 기다렸을 것이다 내 몸의 오지 였던 등을 어루 만지던 손길이 슬픔의로 술렁이던 기억이 있다 펄럭이지 않던 등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했던 등오로 꽂히던 말의 화살이 있었고 등을 타고 넘던 숨소리가 있기는 했다 내 등의 세상의 모든 소리들..

작가들의 글 2022.10.05

물 속의 집 / 장 경림

냇물 속에 집이 있다. 냇물 속의 집은 물풀에 쌓여 아늑하고 잘 씻은 자갈 위에 기초 놓아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어질고 순한 꽃게와 송사리떼가 물속의 집을 들날락거렸다. 언제나 나는 ... 물 ... 속의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집에 들어가 밀린 때가 굳은 등짝을 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문을 연다. 물의 고리를 잡고 문을 연다. 열리지 않는다 문도. 물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어리석은 심사에는 내가 열려는 문고리가 물에 실려 자꾸 떠내려가는 듯이 보였다. 아니면 출렁이며 물무늬가 생기는 만큼 열어야 할 문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못다 연다는 것일까. 또는 물속의 집 속에도 왼쪽 목에 무서운 칼집을 가진 나와 같은 한 불행한 청년이 있..

신현림

해질녘에 아픈 사람 추운 꽃이 내게 안겨오네 추운 길이 내게 말려오네 배고프고 배고파서 북녘 애들 연변으로 도망치네 북녘 아이 노랫소리 사무치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반달 노래 어머니 따라 부르시네 북녘에 남은 동생들 그리워 우시네 봉화처럼 타오르는 반달 노래 가슴을 태워가네 하늘을 찢어가네 우린 한때 미혼모가 되고 싶었다 시간의 자동 펌프는 젊음을 겁나게 빨아올리고 있어 우리는 사정없이 늙어갈 거야 늙음이란 불쾌하지 더구나 혼자 늙는다는 건 해부학 책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야 홀로 마흔까지 산 그녀의 자살을 충분히 이해해 아이라는 아름다운 끈이 있었다면 …… 아이는 신문배달부 자전거를 미는 새벽의 힘이라구 아이 얼굴에서 하얀 성에가 번지는 창문이 보일 거야 내 짝..

신경님 / 農 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혀수경 / 불취불귀 (배경음악 Draconian - A Slumber Did My Spirit Ssal)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한 여자에게서 꺼낸다/장석주 (배경음악 Musa Dieng Kala - Kalamune)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내 이름 아닌 누군가의 이름, 열 마리의 죽은 비둘기, 태어나지 않은 두 명의 아기, 유효 기간이 지난 슬픔 다섯 개, 곰팡이가 핀 그리움 하나를.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서른 세 번 속절없이 지나간 여름, 취해 잠든 열다섯 번의 밤, 한 번 실패한 연애, 구두 뒤축에 묻어온 무수한 바닷가의 모래알들, 언젠가 잃어버린 한 개의 지갑, 빈 담뱃갑처럼 구겨서 버린 꿈, 인생의 텅 빔을 이기지 못했던 절망의 스물한 날들, 아니다, 아니다라고, 포개했던 순간들의 알약 같은 쓰디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