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배용제 10

잠글 수 없는 무개 / 배 용제

한밤중. 어둠 한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수돗꼭지 속 혈은 귀통이로부터 빠져나오는 울음의 찌꺼기. 욕실 새면대 위로 잠기지 않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수도꼭찌 끝에 잠시 웅크리며 온 힘을 다해 끝어 모은 동그랗고 작은 무게가 고인 어둠을 두드린다 아무리 비틀어도 잠글 수 없는 무게. 헐어 버린 분량만큼 연거푸 흘러나온다 곤두서도록 귓속을 파고드는 또렷한 소리가 된다 어둔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된다 단 한번의 소리를 위해 스스로를 깨트려 열린생을 짧게 마감하는 무게는. 좁은 관을 통하여 세상 밑바닥을 흘러 오는 동안 잠기거나 막혀 터질것 같던 시간과 쉽게 쏫아져 버린 기억의 해방. 녹슨 구석에 고인 무게를 비틀어 조인다 목올대 끝으로 거친 압력으로 밀려오는, 내 혈관과 신경줄을 흘러 다니는 것들의..

버려진 의자 (배경음악) Bassic Audiology III- Breeze (2001 remaster)

1 윤기 흐르던 시절, 사람들은 늘 내 편안한 휴식을 어루만지며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온 몸으로 무게들을 견뎌냈다 세월은 뼈마디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이를 악물어도 관절마다 삐걱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를 추방한 건 다름아닌 그들이었다 2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음지의 습기에 발을 담그고 제 살점들이 뜯겨져도 상관 없다는 듯이 한적한 공터를 내내 응시하고 있다 그저 바람이나 앉았다 가라고 손짓하며, 또는 너덜거리며, 삶이란 늘 망가지고 나서야 집과 집 사이의 여백을 발견해낸다 복원될 수 없는 추억들, 스펀지나 솜뭉치 따위 엉성하게 채워져 푹신하게 여겼던, 속살을 드러낸 정체들은 추악하다

울고 있는 아이 (배경음악) Ave Maria - Nina Pastori

시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아이. 울면서도 과자를 먹고, 중고 전자상 티비를 보며 울고, 고개를두 리번거리며 울고. 생선들이 토막나고, 그릇들이 흥정되고, 앉은뱅이 수레가 지나 가고,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겨우 빠져나가고, 땡중이 구걸하고, 그사이 몇 번인가 닭 목이 비틀어지고, 다시 전도사가 지나가고, 튀김들이 익어가고, 모든 걸 구경하는 아이가 울고, 서성이며 울 고, 또 울고. 공중으로 첫 별이 꽂히고, 바람이 뒤섞인 냄새 사이를 휘청이며 지 나가고, 시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곳에 서서 아이는 울음이 젖어 연거푸 울고. 세월이 가고,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돋아나고, 주름이 패이고, 머리칼이 하얗게 바랠 때까지 그저 울고.

이 달콤한 감각 / 배용제

시인의 말 나와 관련된 것들: 나와 너, 나와 사람들, 나와 집, 나와 아버지, 나와 길, 나와 사물들 이런 종류 뿐이겠는가. 나와 별, 나와 공기, 나와 달, 나와 별, 나와 우주, 나와 환상, 나와 얼음, 나와 소명, 나와 영혼 사이에 낀 모든 이야기다. 결국 나와 너 사이. 나는 우주의 풍경과 환각과 있음과 없음의 수많은 이름을 낱낱이 불러 보고 싶다. 먼 너에게 이르는 그때까지. 맹렬하게. 2004.1월 배 용 제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구부러진 길 저쪽 (배경음악 Bill Douglas - Earth Prayer)

그녀는 그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읍의 외곽 구부러진 길을 통하여 이곳에 왔다 망토처럼 걸친 옷차림, 전혀 다른 내용이 쓰여진 서적의 표지처럼 낯설고 거추장스러웠지만, 들쳐보면 어디서 내용을 빠뜨렸는지 아무것도 없는 빈 백지 뿐이었다 어느 고장이든 이런 소품은 있는 거라고 한적한 읍내 풍경에 심심찮게 진열되곤 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웃음을 게워냈다 몸 속엔 웃음 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웃음을 전파하러 온 순례자처럼 온종일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어느새 아이들은 그녀의 신도가 되어 뒤따르며 곧잘 흉내를 냈다 흰 습자지 같은 웃음은, 그러나 깃발처럼 흔들리며 창백한 한낮을 배회했다 착한 사람들은 동정 따위를 들고 모여들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제작기 지난날의 신분에 대해 추측하면서 백지..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그녀의 깊은 속 (배경음악 한태주 - 노을꽃)

들여다본다, 깊은 그녀의 속 그곳은 이미 입구부터 어두웠고 내 눈의 검은 창엔 검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검은 문고리를 더듬더듬 만지며 핥으며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담이 있고 창이 있고 식탁이 있고 텃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온통 검은 것들이어서 처음엔 여기가 우주라는 걸 영 몰랐다 핥고 부벼대면서 그 익숙한 맛과 향기에 나는 한 생애를 기억해낸다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때 그때, 검은 세계는 검은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요람이었고 늪이 놀이터였고 함께 숨쉬던 내 일부였다 온갖 비밀이 내것이었던 생애, 검고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비밀들 이제 검은 것을 보지 못한다 빛을 관찰할 능력 외 대부분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의 생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전혀 안 보이는, 내 존재의 ..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자서 (배경음악 Altan - Slainte Theilinn)

가만히 들여다 보면, 지상은 온통 놀라움으로 이루어진 화면이다. 신비로움, 신비로운 고통들, 지독한 경험과 뒤통수를 노리는 공포들, 나는 그것들과 마주칠때마다 늘 경이로운 탄성을 지른다. 길들과 문들은 모두 죽음이나 파멸 따위를 향해 열려 있으며, 생존하는 것들은 그 통로에서 한 발짝도 벗어 날 수 없다. 다만 삶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버거운 짐짝을 메고 그곳을 한 세월의 구멍을 팔 뿐이다. 지루하고 평이로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길 자유란 소멸이나 파멸의 세계에 있다고 깨달은 무의식의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이후에도 내게 시라는 투명한 렌즈가 들려 있는 한, 나는 무수히 많은 경이로움들을 발견할 것이다.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연거푸 탄성 ..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 (배경음악 Danielle Licari - Et Maintenant)

밤새 고양이가 할퀴고 간 쓰레기 봉투 안, 내가 헝크러진 채 쏟아진다 몇 장의 고지서이거나 구겨진 낙서 조각으로 또는 삼키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되어 역겨운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것은 살이 뜯긴 앙상한 과거이거나 버려진 기억의 나, 그러한 나를 간혹 꿈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낯익은 형상들이 모퉁이마다 뒹굴고 일그러진 표정을 가진 기억에 꿈은 축축한 땀을 쏟으며 한없이 어두워진다 꿈이 되풀이될수록 더욱 많은 내가 들어찬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곳으로부터 압착된 무수한 나는 천천히 썩어간다 꿈은 모두 악취로 가득하다 나는 연신 코를 막으며 삐져나온 것들을 봉투에 쓸어담아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다 묻혀야 할 흔적의 오수가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빛이 꿈의 벽을 할퀴며 지나간 아침, 얇은 꿈에 구멍이 나고 나는..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꿈의 잠언 (배경음악 Aine Minogue - Fyvie Castle)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들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욕망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배경음악 Ancient Cultures - Solitude)

TV에서 본 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 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