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신현림

고독한낙서 2013. 4. 11. 21:39

해질녘에 아픈 사람 
  
                       

추운 꽃이 내게 안겨오네
추운 길이 내게 말려오네

배고프고 배고파서
북녘 애들 연변으로 도망치네
북녘 아이 노랫소리 사무치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반달 노래 어머니 따라 부르시네
북녘에 남은 동생들 그리워 우시네

봉화처럼 타오르는 반달 노래
가슴을 태워가네 하늘을 찢어가네

 

 

우린 한때 미혼모가 되고 싶었다


시간의 자동 펌프는 젊음을 겁나게 빨아올리고 있어
우리는 사정없이 늙어갈 거야 늙음이란 불쾌하지
더구나 혼자 늙는다는 건
해부학 책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야
홀로 마흔까지 산 그녀의 자살을 충분히 이해해
아이라는 아름다운 끈이 있었다면 ……
아이는 신문배달부 자전거를 미는 새벽의 힘이라구
아이 얼굴에서 하얀 성에가 번지는 창문이 보일 거야

내 짝은 없나봐 정자은행이 있다는데
삼십 넘은 미혼녀가 유방암에 많이 걸린다는데
더 늦으면 기형아 낳을 위험도 있어
악어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먹어치울지도 몰라

우선은 내가 위안받고 싶어
아이를 도구로 삼는 게 아냐
우리 나이는 미혼모도 아니야

왜 아이가 잘못될 거라 생각하지
문제여성 취급하는 일도 문제 있어
다들 보려는 것만 볼 뿐
담뱃불로 지지듯 남 얘기를 많이 해
조선반도 여자로서 견딜 자신은 없지만
아이 키울 돈도 없지만
딸을 낳아도 장군처럼 씩씩하게 예쁘게 키울 거야

네 욕망에 동의해
혼자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은 위험해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야 해

불안한 강가에 완강히 에워싼 욕망의 풍경이 슬프다
금일봉이라도 줘서 내쫓고 싶은, 욕망이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 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싱글 맘
 - 술이 쏟아지는 샤워기처럼 
                                 

수많은 이별이 슬픔을 만들고
수많은 눈물이 사람을 만들어간다
좋든 싫든 스위치를 켰다 끄듯이 사건은 터지고
우리네 사랑도 왔다 간다 그동안 내게도
백열등만한 아이가 자라 방을 비춘다

아가야, 엄마는 술이 필요하구나
생존의 회전목마를 돌리느라
오래된 와인처럼 자신을 가꾸지 못했구나
샤워기가 술을 거칠게 쏟아내듯이
다시 열렬한 청춘의 리듬을 타고 싶구나
아가야, 엄만 그리운 것이 많단다
군중, 사내 냄새, 여행, 따뜻한 돈……
사내, 사랑 있어도 없어도 골 아프고
제일 흥미진진한 사람은
우리 자신임을 기억하고 싶구나
어쨌든 삶은 아름다워야 하고
자주 영혼의 기척을 느껴야 한단다

아이와 「엄마야 누나야」를 함께 부르며
아름다운 밤거리에 몸을 맡기니
사방 천지 술이 내게로 흘러온다

 

지금 하고픈 말은 죄다 인용문 속에 있었다 
                                              

하루 걸러씩 내리는 비가 무섭다
지나치면 뭐든 겁나지 않은 게 있을까
된장을 풀어 따뜻한 국을 만들 듯
희망의 군불을 풀어 젖은 옷, 젖은 몸을 말리고
팔을 뻗어 출구가 있는 쪽으로 흘러가지만
태양은 내 심장 속에 있고
꿈은 의자 위에서 쉬고 있다
비정규직 월급봉투처럼 울적한 몸뚱이는
비에 젖어도 슬프지 않게
단단한 껍질을 구우며
홀로 중얼거린다
지금 하고픈 말은 죄다 인용문에 있다고

우리는 도시의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이제 죽음의 도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피터 롱

감각이 마비되고 무력화되어
세상 끝에 서 있다는 느낌을 파하기 힘들다

우리는 결코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려왔고
결코 짧아지는 법이 없는 줄 속에서 기다려왔다
-존 버드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왜 모든 존재는 사랑인가?
그 말없는, 끝없는 대화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
그저 그런 한없는 아귀다툼이다
 
어떤 존재는 속이 빈 무덤 왜 오래된 밀애로
따뜻한 사체를 잉태하는가? 
 

 
이젠 말하기도 싫다
고장난 시계를 풀어두고
네게 끝없이 잡아먹히고 싶다
 
당신이 티슈에 써준 시를 보며
<사랑은 변하여도 사랑이다>에
한참 머뭇거린다
그래, 막 구워낸 빵과 식어서
나무처럼 딱딱한 빵은 여전히 빵이다
 
<피차 사랑하라> 외치며
식은 빵 따순 빵 언 빵이 내게 쏟아진다
하늘에서 땅에서
내 옆구리에서 빵이 구워져 나온다
 
이천년이 돼도 이천년이 지나도
그 빵을 먹고 처치곤란한 기운을 쓰며
나의 모두에게 애정을 기울여도
외로움은 보험처럼 남을 것이다
 
당신도 그 누구도 때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고장난 시계를 고치며
사람들의 바다에 가장 아름다운
고래 한 마리 띄울 것이다

뜻깊은 인생이라고 속삭여 줘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한 시절을 지배한 젊음과 애인
가족과 삽시간에 헤어지다
상심의 덩굴손이 지붕을 뚫고
문 밖으로 사랑의 붉은 원피스가 달려가고
무엇 하나 되흘러 오는 것 없이
이곳은 하염없이 빠져나가기만 하다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밤마다 대머리가 되는 여자
파산한 성찬대처럼 썰렁한 여자
춥고 무서운 여자 가엾은 여자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사랑한 애인이 울린 여자
모든 시간이 버린 여자
그의 삶을 가볍게 해줘
자선냄비처럼 기쁘게 해줘

죽음의 피서지로 떠날 때까지
푸른 우산 푸른 이불을 덮어 줘
그가 헛디딘 곳마다
격려의 십자가가 파어나게 해줘
깊은 인생이었다고 속삭여 줘
그는 나와 나의 너니까
내일의 끝이니까

 

 

세기말 블루스 2

 

후손도 없이 불행한 삶을 살다간
백년 전의 랭보씨와 보들레르 시를 읽었다
카프카와 프루스트의 골목길을 거닐며
그래도 사지 멀쩡히 살아있지 않느냐,
나는 나를 위로했다

행복과 불행은
해바라기와 달맞이꽃 차이가 아닐까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떤 기분일까?
가슴 안 아픈 연애를 했을까?
나의 페니스는 촛불처럼 아름다웠을까?
마음은 돈타령 사랑타령뿐일까?

인생에서 많은것을
기대 말아야 하는 것쯤은 아는데
왜 모든게 힘들까? 힘들다고만 느낄까? 바보같이



세기말 블루스 4

강남 버스 정류장엔 낙엽이 취객처럼 드러눕고
차가 밀리고 밀리는 동안
우울의 경적을 울리며
잠과 짜증도 밀리고 밀려
밀리고 밀리는 일이 사는 거라고
지겨워도 뜰 수 없는 서울을 떠나는 게 꿈이라고

갑시다 어서 갑시다
망할 놈의 차,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듯
차들을 저세상으로 밀어버리고 싶군요
기다림에 지친 눈동자는 풍선처럼 터질 듯합니다

 

세기말 블루스 3


하루종일 새소리처럼 푸른 하늘을 그리워했어
나무를 어루만지고 쓰레기를 걱정했어
노란 달이 떠오르는 걸 환영하며
오래 남는 쾌감을 생각했어

천천히 오르가즘을 느끼게
'원더풀 투나잇'을 따라 부르며
낙서하듯 춤을 추고 네게 엽서를 썼어

시간이 안 아까운 영화와 책을 보렴
시간이 안 아까운 일을 찾아 정열을 쏟으렴
시간이 안 아까운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의 쇠못에 네 전부를 걸으렴

나중이란 없으니까!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꿈꾸는 누드

 

이 남자 저 남자 아니어도
착한 목동의 손을 가진 남자와 지냈으면
그가 내 낭군이면 그를 만났으면 좋겠어
호롱불의 누드를 더듬고 핥고
회오리바람처럼 엉키고
그게 엉켜 자라는 걸 알고 싶고
섹스보다도 섹스 후의
갓 빤 빨래 같은 잠이 준비하는 새 날
새 아침을 맞으며
베란다에서 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승강이도 벌이면서 함께 숨쉬고 일하고
당신을 만나 평화로운 양이 됐다고 고맙다고
삼십삼년을 기다렸다고 고백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