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21

노인/황인숙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편도 1차선 / 이 진수 (들으시는 음악은 / Agricantus - Amatevi 입니다)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 길을 가다 보면 심심찮게 나무들이 차를 세운다. 태워 달라고 특유의 맑은 종아리를 쑥쑥 내놓는다. 그럴 땐 참 아찔하다. 허벅지 보고 뭐 봤다는 식으로 아찔 앗, 질 해 가며 나무의 은밀한 부분을 힐끗거리게 된다. 길에서 차 세우는 나무 중엔 저를 열어 주는 나무도 있다는데, 저 은사시나무를 태우고 바다 근처 바닷가에나 갈까. 가면서 슬쩍 맨 아래 가지를 당겨 볼까. 물관부 체관부까지 전진해서 나무와 몸을 섞으면, 내게도 물이 흐를까. 이파리가 다시 돋아날까. 막상, 새 잎이 돋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상할 것 없으리. 편도1차선의 비좁은 생을 그때쯤이면 거의 빠져 나갈 수 있을 테니, 뒤쪽으로 미끄러지는 풍경들에 손을 흔들며 가까운 해안선을 끼고 나무와 하룻밤 긴 밤 자고 있을..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배경음악 Chris Spheeris - Allura)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며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배경음악 Emily Jane White - Bessie Smith)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 박남준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 내리듯 구멍가게 셔터 문이 내려 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은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다.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린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살아 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밤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쪄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게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 발 실을 수 없었다. 얄팍하게 잔재주좀 부려 퍼오기를 하려 했는데 하하.. 네이버 이 넓은 정보 바다에 이런 시 하나 없었다니. 놀..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 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며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

너에게 세들어 사는동안 -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

당신에게 - 장석주

잎을 가득 피원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의 괴로움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오는 야생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지요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어둠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 왔습니다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 조건입니다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

권태..이상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