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기형도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 오르듯이 (배경음악/헨델 합주협주곡 op.6 12번 협주곡)

고독한낙서 2009. 1. 15. 01:19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黑人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