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미스터 션샤인을 본 후 의식을 치르듯 글 앞에 앉는다

고독한낙서 2018. 10. 1. 01:55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안식처를 찾아 좌정하는 일에 서툴고 매양 허술한 변방에서 꿈꾸듯 먼 불빛을 바라 보는 마음씨 그쯔므로 서성이는성 싶다.

남을 받아 주는 수용에 인색하고 자기를 내어 마끼는 일에 주저 하면서 하나 같이 굶주려 기진해 있는 듯 싶다.

더구나 나는 혼자 있는 시간 따위를 도저히 오래는 참지 못하며 건가을 상해 두러눕게 될 때라도 몸보다 마음이 먼저 비참해져 버려 실없이 눈물을 잘 쏟는다.

감상이 상습이며 엄텅나게도 취약해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았을 것인가.

사람의 고뇌 중에 그 첫번째가 실로 스스로의 무게요 그 마지막 또한 스스로의 무게일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삶에 백가지 고뇌가 따른다고 한들 어차피 그 으뜸은 것은 자기 자신으로 인한 무궁한 회의 또 그 오뇌이리라. 무엇보다 먼저 그 자신이 무겁고 까다롭고 실로

뒤엉킨 실꾸리처럼 수습키가 어려워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소모되며 지치며 이윽고 절망해 버린다고 말하고 싶다.

가가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와 궁극의 연민하며 질긴 철사줄 같은 따갑게 머리를 자극하여 노상 사람은 지쳐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도 내 멋대로 슬퍼져 버리고 누구의 탓 이랄 수도 없는 스스로의 자박으로 묵여 숨막혀 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요즈음 나는 한결 더 고달파서 못견디겠고 든든한 벽과 같은 커다란 가슴에 마음 느긋이 기대고만 싶다면 이 얼마나 몰염치이랴. 고애신 처럼 한 지표를 갖고 불란하는 의지에 불탈 수만 있다면...... 망서리지 않는 믿음 다시는 이탈하지 않을 성실한 사명의식 책임의식 겁 없이 껴안을 수 있는 노무애의 정렬,우정의 정렬, 사랑의 정렬.

그 위에 내 영혼에 평화를 맞는다며, 굵은 돌기둥 같이 줄기찬 힘을 갖는다면, 빛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생의 사계

계절마다 의문과 곤욕이 생겨나고 뒤범벅으로 뜨거운 혼란이 일어나면서 어째도 제각기의 답안을 써 내야만 인생의 한 절기를 지내갈 수 있을을 어쪄랴

스스로 말해 듣기건데

서두르지 말자

비겁하지 말자

쉽사리 얕보지 말고 쉽사리 포기 하지도 말자

열심히 생각 하고 열심히 살자

인생은 숙제를 푸는 도장이다 동시에 죽도록 풀어 못다푸는 수가 많음이 진실로 비극이다.

인생은 무엇이나 본무대일 뿐이고 연습이 허용되지 않아 이 또한 비극이라 하겠거니 누가 한 아이는 연습으로 낳고 다음 아이부터 자식으로 낳던가.

모든 일이 피 묻은 꼭 한번씩이요 단번에 표적을 맞추어야 하는 엄격한 궁술과 같은 것이다.

다시 살펴보는 인생의 네게절 이 중의 어디쯤에 나는 와 있을까.

가을의 중간쯤, 아니면 그 끝무렵일 것이다. 내 생애가 길지 않다고 하면 이미 겨울에 접어들었는지도 알 수 없지마는 어치피 남은 시간동안 나는 성의를 갖고

그 시간들을 영접할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인간이 저지르는 착오중에 어리석은 착오 한 가지가 언젠가 꼭 있을 자기의 죽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현재 살아 있으면서

살았다는 의식다시 말해 스스로의 생명을 자주 망각하는 일이라고 했음이 생각난다.

살아 있는 동안 모름직이 시간과 생명을 잊지 말 일이요 마지막 날이 되면 결연히 미련없이 눈감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꾸 담배를 입에 물게 되는구나 입안도 바짝바짝 말라 타들어 가고 물을 마셔도 소용이 없다. 글 앞에 앉으니 긴장가미 감도라서 일까, 오랜만에 쓰려니 글 앞에 염치가 없어서 일까.

교육학을 전공한 한 사람의 말이다.

"행복을 찾아내기 위에 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섭섭하고 오히려 인간에 따르는 여러 의미성을 새록새록이 발굴하기 위해 산다고 말해버렸을 땐 훨씬 보람찬 느낌이 든다"

는 뜻의 애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의 양식은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으로 행복을 뒤쫒으며 살기 보다는 모르던 것을 알아 가는 기쁨으로 살고 싶다 해서 조금도 잘못일 텃이 없다 제각기 자기의 최선으로 살면 될 것이요, 오직 중요한 점은 얼마나 정직하게 가식 없는 자신을 찾아 지탱해 가느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얼마만큼 스스로의 의사로 독립될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참으로 혼자 설 수 있는 용기, 벌거벗은 정신과 청렬한 개성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

발발하며 또 능히 자율할 수 있는 생명의 강도, 흔한 말로 자주성이 문제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사람들은 정신이 상처입 듯이 감정이 아프기를 잘 한다" 이는 파스칼의 말이다. 그는 정신과 감정이 담화로써 양성되며 동시에 담화로 인해 상처 입기도 한다는 일련의

그의 논조 가운데 위의 귀절을 삽입하고 있으니 그러한 철학적 배경을 깔지 않고서도 저기 않이 공감을 얻는다고 말해 좋을것 같다.

우리의 상처는 대부분이 감정의 상처 이며 심지어는 감각의 상처일 때도 많은건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쓰지 않고 닦지 않고 관여 하는 일조차 드물기 때문이라도

말해서 좋을는지.

정신이 위대할 땐 이에 둔감하면서 감정이 균열이 있으려할 땐 재빨리 곤혹의 비명을 지르는 것이 많다. 나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정녕 이런 일은 범자의 현실이요 그림자에 놀라는 바보들의 환각이다. 하건만 슬픈건 역시 슬프다. 어리석은 내가 생각하는 건 사람은 역시 슬퍼 있고 끝내 슬픈 채로 있을 뿐 이라는 그것이다. 동시에 나는 슬픔의 무용론자이고 싶지도 않다.

슬픔읜 충분히 쓸모 있었으며 사람을 키우는데 있어 불가결하며 유익한 자양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파스칼 같은 이는 슬픔이 인간적 영토 안에서 엄청나게 값나가는 자산 같이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이 갖는 비약적 논조에 대해서도 실상 조금은 알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머리가 아퍼진다 바람 좀 쐬고 들어와야겠다.

파스칼,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사람을 찬양 하기로 작정한 사람, 탓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아울러 질책하고 싶다. 나는 다만 슬퍼 하면서 찾고 있는 사람들밖엔 사람으로 인정할 생각이 생겨나지 않는다" 라고

슬픔은 때때로 상련의 촉매, 겸허의 촉매, 비장한 미의식 또 미학의 촉매, 웅지의 촉매가 되고 있음을 우린들 모르지 않거늘, 인간이 슬픔에 대해 갖는 내성 이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정신이 높아 지는 것도 잘 안다고 할 것이다. 슬픔의 깊고 깊은 심연, 거기서는 바로 신의 정신의 회당으로 가는 통노조차 있음을 이 또한 어슴프레이 감지 한다 해서 좋을것 같다.

어려서 내가 읽은 동화중에 "슬픔의 새"라는 게 있었다  총명한 공주를 가르치는 어느 궁정교사가 종내 슬픔의 뜻 하나만은 깨닫지 못하는 공주에게 어느날 한 마리의 아름다운  새를 선물로 주면서 이것이 슬픔의 새라도 말 해줬다 어린 공주는 매우 그 새를 귀여워 했으나 어느날 아차 하는  순간에 하늘 높히 그 새를 날려 버리고 잃어 버린 새를 차아 내기 위해 단신 숲으로 산으로 헤매며 다니던 끝에 궁궐로 돌아 오는 길도 잃어 버리고 종내 고독과 굶주림에 빠져 한 가지씩 뼈저린 슬픔을 배워 가는 이야기가 씌여 있었다.

슬픔의 맨 처음 스승은 누구 였을까. 그 다음 스승은 또 누구 였을까. 이것은 밖에서 왔는지 우리의 몸 속, 우리의 영혼 숙에서 솟아올렀는지..... 지금 구구스런 넊두리를 하는성 싶어 이 사내는 저의기 민망도 스러우나 슬픔읜 궁극의 미지요 그러면서 처음부터 친구 였다는 모순된 상념의 어긋나는 두 갈래를 어느 쪽도 손 놓아 버리지 못함이 또한 생생한 인간의 사실인 것을.

"자기의 모든 것이 유실되어 간다고 느끼는 건 아주 무서운 일이다" 파스칼의 말을 말을 또 한번 가져 왔거니와 인간의 비극은 우리의 정신이 민감히 슬픔을 탄 다는 사실 말고도 달리 얼마든지 있는 것임을 지적하게 한다.

"위험의 한계 밖에 있어 죽음을 무서워 할 지언정 위험 그 안에선 죽음을 겁낼 까닭이란 전혀 없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 말을 들어 보더라도 사람의 정신이 듣는 준엄한 명령은 우선에 인간이여야 하며 참으로 인간이고저 하는 혼신의 자각, 그 거역할 수 없는 인간적 응답의 발언 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영토는 때때로 그 한계를 거부하고 끝없이 팽창해 간다. 따지고 보면 사람 중에 세상을 견지는 구세주가 날만도 했을 만큼 그것은 풍족한 우주요 풍족한 신비던 것이다. 인간이 태초의 할배 할미의 피조물 일진대 적어도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처럼 섬세하고 또 여러 가관으로 만들어지고 더우기 한없이도 영혼을 인식하게 하시다니.

사람이 자기의 영혼을 생각할 때 그 때는 어떻게 있을까. 하나의 추가 수직으로 멈춰서 듯 적연히 일채의 말도 잊고 홀연한 무섬중에 몸을 떨며 있을까.

눈븥 속의 숲과 같이 모든 바람을 잠재우고 참 조용히 속살을 뒤척이며 있을까. 이윽고는 생각의 눈을 털고  두 팔을 하늘로 뻗혀 올리는 도심으로 넘치는지..........

문득 드는 생각 "지금 나의 영혼은 어떻게 있을까"

그것은 버려진 땅의 강물처럼 보이지 않게 흐를 것으로 여겨진다. 행여는 음악이 없는 쓸쓸한 혼례처럼 외로이 한 사람의 영혼 옆에 더욱 다가 서고만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일까. 참으로 내 영혼의 길벗은 누구일까.

사람의 몸과 정신에 정녕히 반려가 없듯이 사람의 영혼에도 영혼에도 반려 같은건 애당초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영혼은 햇살을 쬐고 어떤 영혼은 비를 맞으면서 제각기 무변광막한 시공에 솟아 나는 한 포기 풀들일지도 모르리라. 생뚱맞게 이 대목에서 구광렬의 들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들꽃/구광렬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

송이송이 피지 않고 무더기로 피어나

넓은 들녁에 지천으로 꽂히니

우리들 이름은 마냥 들꽃이로다

 

뉘 꽃을 나약하다 하였나

꺽어 보아라 하나를 꺽으면 둘

둘을 꺽으면 셋

셋을 꺽으면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을 간지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에서 사노니

내버려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들 어떠랴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없어 좋아라


* 이만 때쯤 산책길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내려다 보면 이름 모를 별꽃

  하나 수줍게 피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 조그만 꽃이

  한설을 이겨낸 게 대견합니다.

  들꽃이 있어서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숲이 아름다운가 봅니다.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바람 만나면 바람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나는 오늘밤 몸시도 수다스러은듯 하다.

 

나의 사념이 한 가지도 아직 정착을 못했기 때문에며 지금 내 안에서나 나의 외부의 일에서도 도무지 명료한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글 쟁이도 아닌것이 왜 붓만 잡으면 세상이 이리도 캄캄해져 버리는지, 왜 사방의 문들은 죄다 닫겨 버리고 아뭇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 깊은 물밑에 혼자 빠져든 것만 같은지......

도저히 안되겠다. 커피 좀 먹고 정신을 좀 가다 듬자.

 

나의 시야는 언제나 좁았었다. 나는 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한 일이 별로 없었고 극히 제한된 몆 사람만을 내 마음에 불러들여 이를 품고 살아 왔을 뿐이다. 더우기 나의 은밀한 기억 속에선 평생을 두고 특정된 몆 사람이 기억 되어 왔을 따름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인색한 사람일까.

심지어 글쟁이도 아닌 내가 글에 있어서조차 몆년전까지만 해도 어느 한 사람, 또는 고작 몆 사람에게 읽히고 싶은 간망을 앞세우고 썻던 일이 흔히 생겨 났었다.

작은 창문에서는 겨우 조금밖에 바깥 풍경이 않듯이 나의 세계도 그 한계가 좁고 불과 몆사람이 여기 담겨져 내 삶의건축을 지탱케 하는 하나씩의 기둥으로 있어준 것과 같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다지 복잡하고 혼란하고 앞뒤가 엇갈리는 모순에 자주 붙잡혔을까.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면서 또한 긍극에 내가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면서 왜 언제까지나 저기 전적인 수용을 망설이고 함께 헐벗은듯이 서서 추위를 탓하기만 잘했었는지.....

이 도한 적은 기름에 댕겨진 불이  큰 빛을 뽑지 못하는 이치에나 겨누어 볼만한 듯 싶다.

나는 무엇을 해 왔을까

내가 찾아낸 가치는 어떤 것들이며 지금 어디에 보존되어 있을까

내가 사랑한 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그래서 지금껏 잃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주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내가 잃지 않았다기보다 그 먼져 내가 그에게서 잃어지지 않고 있는 .... 그 사람은 누구일까.

항용 침을해 지기를 잘 하는 내 글의 버릇 그대로 지금 여기서도 어룩하게 마치도 모경과 같이 이 글이 펼쳐지고 있다. 하겠는지 몰라도 나는 확실히 지금 자실의 심정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탄식해 마지 않는다는 투로 표현해 놓기라도 하면 이것 영락없이 뉘우치는 사내 같을게다.

하건만 내 나이 이미 오십을 넘겨 육십에 가깝거늘 실로 어쪄랴.

"서로 애련히 여김을 가져라 다만 어떤 사람에겐 자비에서 생겨나는 애련을, 또 다른 사람들에겐 경멸에겐 우러나는 애련을 가져야 한다"

이 역시도 파스칼의 말이거니와 우리는 각기 여기 말한 그 어느쪽에 서 있을지는.

자비에서의 애련?

또 혹은 경멸에서의 애련을 주는 사람일지 아니면 애련과의 상관이 있긴 하되 이를 배푸는 입장으로서가  아니고 애련을 받는. 아니 받기 위해 늘어선 긴 대열에 끼어 있는 것쯤 되는... 참으로 그런 처지나 아닐지는...

졸린다.

내일쯤으로 이 글을 미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