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고요하다 (낙옆과,한 여인을 보는 시선에 관하여)

고독한낙서 2018. 10. 10. 01:34

 

 

무섭도록 이리 고요한 시간에 사람이란 거짓말을 못하리.

나의 마당 한쪽 아침에 나뭇가지엔 빈 잠자리

연한 자국만 남고

피 한방을 번진 듯한 다갈빛 잎새들은

차건 땅 위에 눈을 감았구나

모래시계의 모래가 보스락거리는 만큼의 마른 손가락질

이것들 숨소리가 밤 안개로 피었거니........

 

낙옆은 철새인양 오는 엄숙한 애상. 매양 엇비슷한 눈매의 사변을 일깨우며 내집 앞 잔디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날아 들기도 한다.

마치 잠을 청하며 오는 나비들과도 같더니 만산 낙옆이요. 골짜기 마다 덩그러니 낙옆의 더미다. 도시의 가로수도 저마다 조락을 견디며 서 있고, 정원의 수목 또한

몆일 새 껑충하니 여윈 목덜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탈락한 손까락이나 한 웅큼의 검은 머릿카락을 내려다보는 듯한 심정으로 나무는 숩한 땅 위에 내굴린 가량잎을 굽어 보며 있는가.

시들어 떨어져 버린 잎새들의 외로움.

불을 지펴 낙렾을 태우면 불의 향료에 초옆의 향이 풀어져 함께 서리고 조금은 남아 있을 수액도 이에 어켜 하마, 싱그럽다.

낙옆이 주는 의미를 흔히들 우수요, 허무로 치건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만으론 참 어림없는 일이다. 빛과 채색이 물고기 처럼 헤엄치는 발란한 생명의 한 철을 살아 온

해와 바람에 주저 없이 손 흔들고 끈덕진 긴 호흡으로 스스로 그 나무 등걸에 둥근 연륜의 또 하나를 감아온 것이다.

오히려 은혜로운 안식에 거든 허허로이 벗고, 속으론 푸르디 푸른 나무의 넋과 무성한 생명의 거창한 의지를 거두어 억센 발등에 들이붓는 늠름한 자족을 부러워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사람이 나곂을 외롭게 보는 것은 저들 사람이 외로운 탓이요, 사람이 낙옆을 허망하게 보는 것은 저들 사람이 스스로 허망에 겹기 때문이다.

태초의 할배와 할매가 배푸시는 은총의 향연은 언제나 흡족케 하는 그녀의 식탁처럼 많은 이를 부르고 있다.

하면 신목도 이 은총속에 있었고, 낙옆 역시 신비한 은고의 태두리 그 속에 있다.

곧잘 여기서 이탈하고, 자주 이 곳으로부터 추방을 받는 것은 주녀 밑에 죽어 있는 새나 노변에 구르고 있는 낙옆잎에 앞서 바로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 그들이 아닐까부냐. 내 식대로 형식을 따온다면 "인간이란 이름의 낙옆" 오히려 이렇게 쯤 불러 봄직하다.

거울 속에 슬픈 얼굴이 비치는 것은 거울이 슬퍼있는 까닭이 아니고, 참으로 거울을 드려다 보는 어느 얼굴, 그 자채가 슬퍼 있는 때문인 것과 같이 낙옆에서 허무를 살펴 내는 사람의 마은은 그 먼저 스스러운 허무의 자의식이 꽃의 파열 처럼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낙엎은 인간 허무의 고가미요, 산울림 같은 먼 메아리인 것이다.

 

인간 허무의 자의식은 어디서 왔으며 인간은 왜 고독한가. 아니 엄밀히 따져서 인간은 확실히 고독한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자. 인간은 분명 고독한 동물인가. ...

그렇다 영락도 없이 인간은 고독한 영혼과 욱체를 가졌다. 물안개에 젖은 고도의 등대처럼 <나 혼자> 의 의식에서 늘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기실 사람이다.

하면 인간에게 있어 과연 얼마나 고독이 유해 했었나를 또한 생각해볼 일이다.

독버섯으로 불그러져 솟아나는 고독도 아침저녁 물주는 화초로 알자커니. 이렇게 말하는 심정을 뒷받침하여 차라리 고독도 나무처럼 키워 보자는 꿈을 가져 본다.

쾌적한 풍토를 가려서 심어 주고, 구김살 없는 하늘을 향하여 실컷 손을 뻗게 해 준다면 어떨까.

 

필경은 고독도 하나의 은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갈구하며 접근하는 것도 고독의 소치요, 나아가 인간이 신께 바치는 뜨거운 갈원의 부르짖음도 실은 이 고독의 목소리라고 해야 할 거시기 때문이다.

고독이 사람을 떠났을 때  사람은 신을 망각하고 그 이웃을 저버린 것이었다. 다시 고독이 문을 두드리고 찾아 오면 눈물에 젖어 경건히 인간 본연의 온정에 눈을 뜨지 않건가.

낙옆속에 깃들인 고독

고독속에 불씨처럼 숨겨진 욕정

이러한 것들을 찾으며 정들이며 살아가고 싶다.

인생은 차가운 석기 모양 만지면 만질수록 손이 시린 그러한 느낌의 시간인들 얼마나 많은가.

인생은 애당초 그림자도 없이 태어난 것 모양으로 만은 사람 속에 찾으면 찾을 수록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그러한 설움인들 알마나 잦던가.

그러나 인간이라는 그릇을 채워가는 질량에 있어 이러한 감정은 그리 나쁜 축이라고 할 수 없다.

입맛엔 쓴 선약 (애인,부부)의 경우 처럼 고독도 인간을 고치고 인간을 키우는 신령한 약효를 가졌다곤 아니할 수 없다.

이를테면 슬픔에서도 품격을 따질 수 있듯이 고독에 있어서도 품격을 말해 볼 수 있으리.

격조 있는 고독.

격조 있는 슬픔.

그러한 나무를 잘 가꾸 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인생의 부유자요, 결코 인생의 빈자일 수는 없으리라 믿는다.

부유자를 자쳐하고 싶은 그런 선망은 없지만, 우리ㅢ 마음 속에 가시넝쿨처럼 아픔을 번지게 하는 고뇌의 식물을 어떻게 가꿔 갈 것인가의 그 지혜는 꼭 얻어야만 하겠다.

고독이 어쪌 수 없는 인간의 상처이고 보면, 오히려 그 그 상처를 다스려서 인간의 영광된 기장으로 바꿔놓은 그런 방법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모색해 본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 아나라고 생각되어 진다.

꽃을 피우는 것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이를 떨어뜨림은 참으로 황금처럼 다져진 열매를 존절히 지킴에 여념 없이 하려는 데 있다고 할 양이면, 여기서도 얻는 바 얼마나 깂진 교훈이 인간에게 보탬해 주는가를 생각해 보자.

낙옆의 교훈,

낙옆의 사변,

만만찮게 멋진 과제를 주는 그 여인,

이 모두는 평생 풀어야 할 과제라고 할 밖에 없다.

 

"그대의 무게가 늘면 늘수록 나의 가지들은 탈력과 윤기가 남아 돌게 되고 만약에 당신이 그 중량을 거두어 가버리면 나에겐 일시에 조락만이 와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