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57

몽환적 10월 / 전혜린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 / 톨스토이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잘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자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개개인에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것, 즉 행복을 얻는 일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자기 개인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기가 바라는 행복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행복인 것 같이 생각된다. 그에게 실제 살아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존재의 생활은 자기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 같이 느낀다. 즉 그저 생명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생활을 그저 관찰할 따..

작가들의 글 2009.01.21

40대의 비 오는 날..... 박완서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 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

작가들의 글 2009.01.21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 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 해라고 말하고,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작가들의 글 2009.01.21

동전을 뒤집으며 / 김세기 (오랜 웹친구)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나온다 백원을 뒤집으니 이순신장군 나오고 오십원을 뒤집으니 벼이삭 나온다 멀거니 줄 서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나 훔쳐보며 동전 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서는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신문에 난 연쇄살인사건과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소식을 보며 북녘의 동포들은 끼니를 거른다는데 동전밖에 없는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못난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소리로 못하고 땡볕에 서서 다보탑을 뒤집으니 십원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먼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무엇이든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해서 일없이 동전만 뒤집는다

작가들의 글 2009.01.21

그 여자.. (네이버 블러그 방문자 글)

한 여자가 있습니다 글자를 알기도 전부터 그의 어미는 늘 아팟습니다 아프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아픈게 어떤건지를 너무 일찍 알아 버렸습니다 간혹 아프단 소릴 하지 않는 날은 왠지 허전하기 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의 어미는 아주가끔 웃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착한일을 했다거나 이쁜짓을 하면 빙긋이 웃어주곤 했었죠 그여잔 그래서 언제나 웃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 웃는 모습이 너무 편해서 착한아이로 자랄수밖에 없었어요 머리가 나빠 공부로는 자신이 일찌기 포기를 했었고 잘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설거지 청소 밥 어미가 해야될 일들을 하나씩 도맡아 하기 시작한것이 초등학교 3년 부터 였으니 얼마나 아픔이란것이 싫었는지 말입니다 차츰 커가면서 버젓이 어미가 있음에도 아이인체 아줌마로 효녀로 착한 동생으로 가족..

작가들의 글 2009.01.21

기다렸으므로 막차를 타지 못한다 - 박남준

남은 불빛이 꺼지고 가슴을 찍어 내리듯 구멍가게 셔터 문이 내려 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서성이며 발 구르던 사람들은 이젠 보이지 않고 막차는 오지 않는다. 언제까지 나는 막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춥다 술 취한 사내들의 유행가가 비틀거린다 빈 바람을 남기며 골목을 돌아 살아 지고 막차는 오지 않을것인데 아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처럼 밤길 돌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어쪄면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일 같은지 막차는 오지 않았던게 아니다. 막차를 보낸 후에야 막차를 기다렸던 일만이 살아온 목숨 같아서 밤은 더욱 깊고 다시 막차가 오는 날에도 눈가에 습기 드리운 채 영영 두 발 실을 수 없었다. 얄팍하게 잔재주좀 부려 퍼오기를 하려 했는데 하하.. 네이버 이 넓은 정보 바다에 이런 시 하나 없었다니. 놀..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 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며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

너에게 세들어 사는동안 -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