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57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배경음악 Francis Cabrel - Esta Escrito)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으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의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선운사에서 / 최영미 (배경음악 - Terry Oldfield - The Africans)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잠글 수 없는 무개 / 배 용제

한밤중. 어둠 한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수돗꼭지 속 혈은 귀통이로부터 빠져나오는 울음의 찌꺼기. 욕실 새면대 위로 잠기지 않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수도꼭찌 끝에 잠시 웅크리며 온 힘을 다해 끝어 모은 동그랗고 작은 무게가 고인 어둠을 두드린다 아무리 비틀어도 잠글 수 없는 무게. 헐어 버린 분량만큼 연거푸 흘러나온다 곤두서도록 귓속을 파고드는 또렷한 소리가 된다 어둔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된다 단 한번의 소리를 위해 스스로를 깨트려 열린생을 짧게 마감하는 무게는. 좁은 관을 통하여 세상 밑바닥을 흘러 오는 동안 잠기거나 막혀 터질것 같던 시간과 쉽게 쏫아져 버린 기억의 해방. 녹슨 구석에 고인 무게를 비틀어 조인다 목올대 끝으로 거친 압력으로 밀려오는, 내 혈관과 신경줄을 흘러 다니는 것들의..

노인/황인숙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편도 1차선 / 이 진수 (들으시는 음악은 / Agricantus - Amatevi 입니다)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 길을 가다 보면 심심찮게 나무들이 차를 세운다. 태워 달라고 특유의 맑은 종아리를 쑥쑥 내놓는다. 그럴 땐 참 아찔하다. 허벅지 보고 뭐 봤다는 식으로 아찔 앗, 질 해 가며 나무의 은밀한 부분을 힐끗거리게 된다. 길에서 차 세우는 나무 중엔 저를 열어 주는 나무도 있다는데, 저 은사시나무를 태우고 바다 근처 바닷가에나 갈까. 가면서 슬쩍 맨 아래 가지를 당겨 볼까. 물관부 체관부까지 전진해서 나무와 몸을 섞으면, 내게도 물이 흐를까. 이파리가 다시 돋아날까. 막상, 새 잎이 돋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상할 것 없으리. 편도1차선의 비좁은 생을 그때쯤이면 거의 빠져 나갈 수 있을 테니, 뒤쪽으로 미끄러지는 풍경들에 손을 흔들며 가까운 해안선을 끼고 나무와 하룻밤 긴 밤 자고 있을..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배경음악 Chris Spheeris - Allura)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며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배경음악 Emily Jane White - Bessie Smith)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

버려진 의자 (배경음악) Bassic Audiology III- Breeze (2001 remaster)

1 윤기 흐르던 시절, 사람들은 늘 내 편안한 휴식을 어루만지며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온 몸으로 무게들을 견뎌냈다 세월은 뼈마디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이를 악물어도 관절마다 삐걱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를 추방한 건 다름아닌 그들이었다 2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음지의 습기에 발을 담그고 제 살점들이 뜯겨져도 상관 없다는 듯이 한적한 공터를 내내 응시하고 있다 그저 바람이나 앉았다 가라고 손짓하며, 또는 너덜거리며, 삶이란 늘 망가지고 나서야 집과 집 사이의 여백을 발견해낸다 복원될 수 없는 추억들, 스펀지나 솜뭉치 따위 엉성하게 채워져 푹신하게 여겼던, 속살을 드러낸 정체들은 추악하다

울고 있는 아이 (배경음악) Ave Maria - Nina Pastori

시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아이. 울면서도 과자를 먹고, 중고 전자상 티비를 보며 울고, 고개를두 리번거리며 울고. 생선들이 토막나고, 그릇들이 흥정되고, 앉은뱅이 수레가 지나 가고,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겨우 빠져나가고, 땡중이 구걸하고, 그사이 몇 번인가 닭 목이 비틀어지고, 다시 전도사가 지나가고, 튀김들이 익어가고, 모든 걸 구경하는 아이가 울고, 서성이며 울 고, 또 울고. 공중으로 첫 별이 꽂히고, 바람이 뒤섞인 냄새 사이를 휘청이며 지 나가고, 시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곳에 서서 아이는 울음이 젖어 연거푸 울고. 세월이 가고,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수염이 돋아나고, 주름이 패이고, 머리칼이 하얗게 바랠 때까지 그저 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