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57

당신에게 - 장석주

잎을 가득 피원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의 괴로움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오는 야생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지요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어둠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 왔습니다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 조건입니다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

이 달콤한 감각 / 배용제

시인의 말 나와 관련된 것들: 나와 너, 나와 사람들, 나와 집, 나와 아버지, 나와 길, 나와 사물들 이런 종류 뿐이겠는가. 나와 별, 나와 공기, 나와 달, 나와 별, 나와 우주, 나와 환상, 나와 얼음, 나와 소명, 나와 영혼 사이에 낀 모든 이야기다. 결국 나와 너 사이. 나는 우주의 풍경과 환각과 있음과 없음의 수많은 이름을 낱낱이 불러 보고 싶다. 먼 너에게 이르는 그때까지. 맹렬하게. 2004.1월 배 용 제

여행자 (배경음악/Aaron Angello - Our Canon in D)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권리는 있지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었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

겨울 눈(雪) 나무 숲 (배경음악/엘가 - 사랑의 인사)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청결(淸潔)한 죽음을 확인(確認)할 때까지 나는 부재(不在)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距離)를 두고 그래, 심장(心臟)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完璧)한 자연(自然)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後)에 눈 녹아 흐르는 방..

우리동네 목사님 (배경음악/Adiemus - Adiemus)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뒷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마을을..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 오르듯이 (배경음악/헨델 합주협주곡 op.6 12번 협주곡)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黑人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집시의 시집 (배경음악/소지로-水舞龍(춤추는 용)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오후 4시의 희망 (배경음악/소지로_大黃河(대황하)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새로운 사랑의 뜻 (배경음악/Bernardo Sandoval - Como Olas)

바하만의 속에 있어서의 사랑의 문제 영적 체험의 안테나로서의 독일 현대시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현대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시의 특징이 우리 시대의 다이나믹에 의해서 뒤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싸우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도피하고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동경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세계상과 생과 감정의 완전한 변화를 알고 있는 이 현대시는 새로운 인식-시간 의식과 공간 의식의 변화, 자연 과학에 의한 자연과 세계의 분리, 기술과 기계에 의해서 개인적 개성적인 것이 발하는 위협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현대시의 일부는 트라클 하임 등이 시초한 표현주의의 길을 가고 일부는 전연 새로운 길을 간다. 이 현대시의 핵심은 자아와 다각적인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의해서 복..

일기로부터의 단상 (배경음악/David Pena Dorantes - Orobroy)

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 1964. 1. 18.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소시민적 일요일 ― 1964. 1. 19. 권태와 어느 안정감 ― 소시민성 속에 자기를 고정시키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 빈 공허감이 내 가슴을 찬 바람 불 듯 지나간다. 감정도 애증도 다 멀어진 느낌. 가정, 직장, 나, 국가, 사회...... 이런 단어들이 아무 연결도 없이 내 머리를 지나갔다. 시간의 풍화 작용― 1964. 1. 19.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