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깨다 - 장석남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화두(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무지(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견고(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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