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도 감정노동이다 32

사평역에서 - 곽재구

사평역에서 -곽재구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

만나야 할 사람은 오지 않는다 - 박종화

만나야 할 사람은 오지 않는다 / 박종화만나야 할 사람은 오지 않는다술 취한 이들은 가끔씩 비틀거리고건너편 편의점 유리창 안으로컵라면 젓가락질 소리만이서걱거리고 있다시끄러운 듯 고요한깊은 밤 거리에서낯 설은 얼굴끼리밤을 낮 삼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몇몇은 어둠에 기댄 채로 비틀거리며두서없이 귀가를 헤매고나는 아직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언제나 만날 수 있을까헤일 수 없이 많은 시간들을 만지작거리며기다렸던 순간들은좀처럼 오지 않는 희망을 위해참아야함을 강요하고한 송이 붉은 장미를 들고 오는광야의 여인처럼길고 긴 시간의 여울목을 지나새벽을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세뇌시키며 끝없이 강요하고 있다만나야 할 사람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문을 닫으려는 포장마차다시 천막을 열어 젖히는 순간까지나는 새벽을 믿으며또 한 번의..

오탁번 -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

무채색 피 - 박건호 / 고독한낙서 낭송

박건호 - 무채색 피 마실 갔다가 바짓가랑이 적시고 돌아오면 사랑이다달없는 그믐 밤이거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지만 어느새 온몸을 함초롬히 적셔오면 사랑이다얼핏 바라보면 돌의 표정을 하고 움직일 것 같지도 않으면서 가벼운 콧김에 살랑살랑 흔들리면 사랑이다설악산 흔들바위처럼 흔들흔들 하면서 쓰러지지 않으면 사랑이다살짝 손을 한번만 대보고 맥박 소리를 느낄 수 있으면 사랑이다가끔씩 시베리아식 바람이 불어오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가슴에 불의 화상을 입으면 사랑이다정열을 속에 감추고 며칠씩 견디려고 하다가 ? 몸살로 온몸이 펄펄 끓게 되면 사랑이다감춰진 표정들을 읽으면서 피차 모른 척하면 사랑이다우리를 취하게 하면서 알코올 성분이 없으면 사랑이다술보..

기형도 - 노을

기형도 / 노을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하며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長으로 몰려들어몇 점 폐후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時의 참혹한 刑量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무서운 時間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을 몰아내고 있다.都市는 곧 活字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이 되리라.勝負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午後 6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밤..

사랑하지 않는 者, 모두 유죄다 - 조민혁 낭송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 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 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

당신에게 - 장석주 (조민혁 낭송)

당신이게 / 장석주 잎을 가득 피원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의 괴로움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오는 야생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지요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로지 어둠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 왔습니다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 조건입니다 난 사막의 모래..

어제 / 박정대 (고독한 낙서 낭송)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 李賀의 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