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116

고재종 - 나무속에 물관이 있다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나 굵은 것이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 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대거나 휙휙 후리거나,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린다.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의 주춧기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 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만한 새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칠흑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의 흙샅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 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것 하나라도 어떤 댓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 주는가.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아왔느니. * 우듬지: 나무..

고재종 - 그 아저씨, 그런데, 지금은 없다 /David Darling- Bach's Persia

David Darling- Bach's Persia 대슾 뒤켠 200여. 두의 비육우를 치는 축사였다. 읍내 우시장 서는 날이면 축사 앞에 설치된 철제 틀 속에서 크낙한 소를 더 키우려고 용을 쓰곤 했다. 아귀를 벌려 두어 됫박의 소금을 욱여넣고, 식도 깊숙이 물호수를 밀어 넣고, 등짝이며 뱃구레를 냅다 몽둥이질해 대던 사람 이야기다. 소거간꾼을 해서 없는 집을 일으켜놓고선 이젠 벤츠 기름 값을 벌충하려고 그러나? 그 조악한 짓 한 시간이면 이삼십만 원은 거뜬하다고 누렇게 웃곤 했다. 글안해도 개기름 밀리는 얼굴이 땀범벅이 되도록, 울음소리도 못내고 차마 눈깔 뒤집던 소처럼 용을 쓰더니 그 사람, 그런데, 지금 없다. 하루 종일 축사에 마블링 좋게 나오게 한다며 클래식도 뜰어주던 그 사람. 그 마블링..

산등성이 / 고영민 /길태안-그대에게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됐든 한 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대소사가 있을 때 차려 입는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흑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 마을의 한 밤, 아버지는 이 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 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 모습, 잰 ..

이런 고요 / 황동규 /기슭으로 가는 배

이상한 마을에 왔다. 며칠 내 낙엽을 쓸어 담다가 하루아침 찬비 맞고 생(生)몸이 된 완산 화암사 적묵당 툇마루에 비치는 하늘 가을의 끄트머리답게 너르게 밝고 캄캄한 하늘 극락전 처마 공포(空包)들 일제히 고개 숙이고 하나같이 혀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고요! 생각나면 이는 바람 소리와 바람 소리에 찢기지 않는 새소리. 오래 앉아 있던 산이 상체를 들려다 말고 물들은 멈추기 싫어하는 기척을 낸다. 있는 것과 가는 것이 서로 감싸고 도는 고요. 때늦은 수국과 웃자란 풀들이 마음대로 시들고 사람들이 목젖에서 끄집어내며 여미는 소리 문득 빈말이 된다. 눈 크게 뜨고 귀 세우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달라붙어오는 감각, 이 세상 것들,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 얼굴의 표정 하나까지 무한대(無限大)로 살가워진다. 소리 없이..

훼방둥이 / 황동규 /Sia - the church of whats happening now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밤 정선 야외 축제에서 시 낭송 마치고 단에서 내려와 뒤편에 열려 있는 임시 술집 천막 자욱한 비안개 속에 꼬치안주로 소주를 홀짝이다 빗발 가늘어진 틈을 타 소주 가득 담긴 맥주잔 든 채 소피 보러 나간 어둠 속 나무에 기대어 남자에게 따뜻한 젖 먹이고 있던 여자 빗물 어른대는 속에 그 가슴 얼마나 넉넉하게 보이던지, 빗물 탄 술 천천히 끝까지 들이켰다. 이튿날 아침 펜션 마당을 거닐며 계곡 물소리에 귀를 내주다가 누군가 뒤에서 소곤대는 기척 있어 고개 갸웃대는 개미취들에게 다가가 귀 기울이니 ‘훼방동이!' 그동안 귀가 많이 열어졌군. 지난 밤비에 물 가득 분 강가로 간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밤 젖은 나무에 기대어 남자에게 따뜻한 젖 먹이고 있던 여자…… 찬 술 마지막 방울까..

대상포진 - 황동규

백창우 - 빈집 (기형도 시) 병 이름 제때 몰라 아픈 왼팔 접지도 못하고, 십 년 전 가출했다 탕자로 돌아온 오십견이군! 할 수 없이 다시 데리고 살 준비를 하는데, 잠자다 아파 깨어 울음 참고 눈물 쏟는 사이 가구들이 뒤로 물러서고 개나리 지고 벚꽃 피고 라일락이 가쁜 숨을 내쉴 때 불현듯 대상포진이라는 옛 진법(陣法) 같은 이름이 나타났다. 병원에 다니며 다시 사흘 밤을 눈물 흘리며 잠을 설친다. 아파트 영산홍이 피고 산책길 뙈기밭 가에 꽂혀 녹슬던 가시투성이 막대들이 연초록 두릅 순을 피우고 있었다.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찢으며 피우고 있었다. 아 또 한 번의 삶! 온몸의 피가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틈새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꾼 아침, 가구들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천천히 대면하는..

풍장(風葬) 1 - 황동규 / Agricantus - Hawa

Agricantus - Hawa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

풍경의 깊이 / 김사인 / Alexi Murdoch - Song for you

Alexi Murdoch - Song for you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 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조이미용실/ 김명인 / Gurdjieff, Tsabropoulos- III

늦은 귀가에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입구의 파리바게트 다음으로 조이미용실 불빛이 환하다 주인 홀로 바닥을 쓸거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셔터로 가둬야 할 하루를 서성거리게 만드는 저 미용실은 어떤 손님이 예약했기에 짙은 분 냄새 같은 형광 불빛을 밤늦도록 매달아 놓는가 늙은 사공 혼자서 꾸려나가는 저런 거룻배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 허술한 내 美의 척도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몇십 년 단골이더라도 저 집 고객은 용돈이 빠듯한 할머니들이거나 구구하게 소개되는 낯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사는 일 - 나태주 / Tom McRae - Hummingbird Song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