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70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이병우- 연인

밤늦게 귀가 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루 열 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 할 때면 큰 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은 막다른 골목 같다. 옐로우 하우스 빨간 벽돌 건물이 집 앞에 있는 데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가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 진열된 여자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을 배달 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을 타는 아가씨, 붉은 등 유리 방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이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

김재진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김선우 / 얼레지 / Alejandro Filio - Dicen

Alejandro Filio - Dicen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 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 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유경 / 섬, 이유/Rene Aubry- Walk The Reeds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김선우 - 오 고양이!/Jon and Vangelis- Missing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 받아 현미경에 얹는다 보세요, 당신의 적혈구들이에요 몸 밖에서 나를 쏘아보는 내 피 한 방울 수백 마리 고양이 눈알을 삼킨 듯 검사실의 모니터가 오글거리는 눈동자로 발광을 한다 어느 산길에서 갓 낳은 산고양이 두 마리를 보았다 어린 고양이들 혀를 내밀며 가을볕을 냉큼냉큼 받아먹고 있었는데 이뻐서 그저 무심히 쓰다듬었던 노랑털 어린것은 다음 날 죽어 있었다 어린것의 몸에 밴 사람 냄새에 어미는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한 방울 피가 방주를 밀어 올리며 범람하는 모니터 안, 싸늘하게 식은 어린것의 눈알과 제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어미의 눈알이 나를 노려본다 어느 깊은 새벽 검은 도독고양이에게 돌팔매질을 한 적 있다 밤마다 쓰레기 더미..

김선우 - 봄날 오후 / Graeme Allwright - La Mer Est Immense

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색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머니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 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아 -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 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고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피워주세요 당신의 모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 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

김선우 - 별의 여자들 /Red House Painters - Michael

태양의 흑점이 커지던 날, 바람이 사라졌다 내가 도달한 다른 우주의 문은 찬바람이 걸어간 산길이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나는 지구 몸속의 다른 별에 들어섰다 내 몸속에 내가 모르는 다른 우주가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화창하게 갠 날이 저녁 가까이 날고, 수많은 물고기 뼈들이 공중을 헤엄치며 아무 데서나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셈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별의 여자들은 내내 이곳에서 살아왔다 잇꽃빛 번지는 노을 속에 여자가 그늘을 묻는다 여자의 푸른 유방에서 죽은 별들이 흘러나왔다 여자가 텅 빈 우주를 자궁 속에서 꺼낸다 지구 표면으로 통하는 모든 문 위에 붉은 부적을 걸고 싶은 날, 내 몸에 묻어온 독기에 찔려 여자의 손이 자꾸 허공을 짚는다 둥글..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Prem Joshua - Darbari NYC -Maneesh de Moor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

강미정 참 긴 말 / Irfan- Invocatio II

일손을 놓고 해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이라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 엄마 언제 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 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 같이 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 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지며 듣는 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 살 붉은 손이 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 잘 있냐? 병 앓고 일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핀 꽃처럼 소리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조영래 - 인간선언 / 노래-일어나라 열사여

정태춘 - 일어나라 열사여사랑하는 친구여, 받아 읽어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태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