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도 감정노동이다

무채색 피 - 박건호 / 고독한낙서 낭송

ivre 2011. 2. 4. 14:26

 

 

 

박건호 - 무채색 피
 
마실 갔다가
바짓가랑이 적시고 돌아오면 사랑이다

달없는 그믐 밤이거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지만
어느새 온몸을 함초롬히 적셔오면 사랑이다

얼핏 바라보면 돌의 표정을 하고
움직일 것 같지도 않으면서
가벼운 콧김에 살랑살랑 흔들리면 사랑이다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흔들흔들 하면서
쓰러지지 않으면 사랑이다

살짝 손을 한번만 대보고
맥박 소리를 느낄 수 있으면 사랑이다

가끔씩 시베리아식 바람이 불어오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가슴에 불의 화상을 입으면 사랑이다

정열을 속에 감추고 며칠씩 견디려고 하다가 ?
몸살로 온몸이 펄펄 끓게 되면 사랑이다

감춰진 표정들을 읽으면서
피차 모른 척하면 사랑이다

우리를 취하게 하면서
알코올 성분이 없으면 사랑이다

술보다 독하면서 건강을 해치지 않고
자신들도 모르게 중독이 되고
마음이나 패션같은 것이 점점 젊어지면 사랑이다

심심풀이 끝에 한번 걷어차면
땅에 박힌 돌부리처럼 꼼짝하지 않고
발끝만 아파오면 사랑이다

또 하나의 동맥이 되어
혈액순환이나 하듯 온몸을 돌게 되는
무채색 피
어쩌면 백혈구나 적혈구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사랑이다

한번 생겨나면 죽을 때 가서나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