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층의 한 쪽 벽에 기대어 창으로 들어 오는 으즈음 광선이 비로소 평화롭고 말도 못하게 아름답다.
젊었던 날엔 이 시간을 위해 비장한 한 사랑을 꿈꾸곤 했으나 오늘은 잠시동안의 이 편안감만으로 만족하고 황송하다.
춥다.
역반응과 모순의 넝쿨에서 초록의 순이 뻗어 난다. 긍국적으로 말해 삶에 대한 나의 신뢰는 얼마나 회손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감격과 긍정에 대한 기대는 잠시 가리워 졌다간 다시 살결을 드러낸다. 더러는 햇빛안에, 달빛 안에 떨어 지기도 한다.
그간의 어혈이 풀리고 포도주 같은 핏물이 공기 속에 번져 난다.
이런 때 나는 어쪄나.
사랑의 은밀에 대해 말해 보려한다.
"사랑이란 짓거리지 않고선 못 배기는 아내와 같고 잠은 침묵으로 대답 하는 남편과 같다" 는 싯귀를 타골의 글에서 읽었거니와 그렇듯이
사랑은 말하는 충동을 가졌다고 하면 위의 경우는 우선 이 통념을 벗어나고부터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볼 때 사랑의 은밀이야 말로 곧 사랑의 언어이다. 오히려 가장 능동적이고 구체적이며 지극히 성실한 사랑의 웅변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묵언을 떠나서 사랑을 나타낼 언어는 다시 없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개별성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은밀을 요할밖에 없을 땐 당연히 그럴게 아니겠느냐구.
허나 내 얘기는 다른 데에 있다.
얼마든지 거리낌이 없을 그런 처지일 때도 사랑의 은밀은 사랑의 첫번째 도의요 없지 못할 예법이리라는 그 주장이다.
깊고 깊게 감싸는 사람 마음의 오지에 심어 자라게 하는 나무. 소중할수록 소중하게 때문에 두 사람의 내전에만 풀어 가꾸는 그 약속이라니.
진실로 눈물겨움이라니. 아무도 듣지 않게 말하는 기도 귀절처럼, 누구도 모르게 전수 하는 가문의 비전처럼, 이 역시 은밀할 수록 복 되고 안전하고
아름다우리라. 무거운 나름으로 중심이 더욱 가라 않는 물체의 이치처럼 이 또한 바꿀 수 없는 귀중함임으로 다른 도리가 없는 사랑의 진심이리라.
"내 사랑은 완전 범죄였다"
이와 같이 말 했을 때 "누군 아닌가? 나도 그럴 껄?"
미소지으며 획신있게 댓꾸할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의 은밀 이런것도 없고서야 사람 마음의 황량한 그 심연을 어찌나 감당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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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누구인가?
진실로 내 삶에서 누구란 말인가.
나는 당신의 누구인가?
올 한해 내 시력이 건강했었나를 도리켜 생각한다.
잃은 사람이나 새로 얻은 사람이 있었는가?
닫혀진 문 앞에서 나직이 내가 노트 했었나? 그랬는데 열리지 않았었나?
내 감정은 매우 가라 앉았다. 자꾸 밑바닥으로 처져내려 생사의 결단 보다는 더 가파롭게 쳐져 내려 정녕 바닥에까지 침잠한 것이다.
한 덩이의 석탄이다. 허나 속속들이 기름이 부글거리고, 불을 댕겨 붙이면 삽시에 펄럭이는 화염이 또 된다.
왜 괴로와 하나? 무엇을?
그 혼하고 오랜 습성, 명제도 불투명한 번민의 자못 이성의 오욕이라 하겠는 걸. 하면 그동안 무엇을 번민했나를 말해 보라. 말해 보라.
그리고 또한 사랑 했었나?
아슬한 엣날, 이름도 저승인 그 전세에서 필시 그대의 지아비였다고 믿는 그 믿음으로 사랑했었나?
그대 늑골의 하나에서 빚은 세 번째 세상의 혈연, 저승과 이승의 지어미라 여기며 진정 사랑 했었나?
이 때 사람의 생명은 말도 못 할 만큼 깊고 풍성해 지는 충일, 진실로 범연찮은 시혜이지. 별외의 햇살 썩 귀중한 조명.
그렇다. 머저 세상의 명멸하는 기억이 사나운 충동으로 화해 갑지가 현세의 폭풍으로 부는 일은 이밖에도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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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은
덕성의 대명사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랑은 생소한 손님도 아니면서 막상 그 참 얼굴을 보았는지의 질문 앞에 설 땐 그만 심약해 버리고 만다.
나의 경우는 글이나 얘기 중에 사랑을 운위 하는 일이 적지 않아 나를 사랑논자 부류에 넣고 보는 시선들이 있으나 . 말은 뻔질나게 잘 하나 사랑에 있어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걷는 간난아기 수준이라고 한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흔히 서정시의 대표적 명맥인 연애감정에 발붙였을 경우가 많다. 이쯤의 태두리라도 질량이나 밀도는 만만한게 아니다.
아프고 숨가쁘며 참담한 상처이거나 회오, 침잠, 끝없는 구도적 필력에도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전모를 살피고 사랑의 진수를 헤아리려는 열띤 이지로서는
이 정도에 안착하지 못하리라 왜냐 하면 사랑의 진정한 지평은 훨씬 더 넘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사랑하기 위하여 선택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안일한 노릇이다. 단순한 욕망에 이끌리는 소아적 충동과 얼마 다를 바가 없으며 이를 따라가는건 설익은
자신감과 한때의 웃음뿐일 수가 있다. 그러나 얼마도 못 가서 승복의 비명들을 내어지른다. 백옥 같은 이마에 금이 가고 붉은 피가 실날처럼 길게 흘러 내린다.
사랑의 부상이다. 그러나 사랑의 어리석음이여. 이 실패는 전혀 에상 밖이라며 당황한다.
사랑은 덕성의 대명사여야 하지 않을까.
인격의 성년기에 비로서 입게 된 후천의 복된 체질일 뜻만 싶다. 인간적이며 성인적인 도량, 장미 내음이 풍기는 단맛의 피가 전신을 순환하는 향기롭고 축복된
체질, 그런 사랑은 진정히 사랑할 줄 알리라. 민음과 신뢰는 태산보다 강하여 깨지지 않는 그런 사랑은 진정히 사랑할 줄 알리라
잠자고 있는 화약전이 아니고 실지로 사랑의 불을 담아 빛나는 불심지가 사방에 산호빛 불꽃을 뿌리는 바로 그 사랑일 것이다.
이 나이 먹어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나는 생각하기를 사랑에도 소질이 있는 법이고 심지어는 사랑의 천재라 할 사람도 있다고 여겨진다.
어떤 어려움에도 사랑을 만들어 내며, 절대의 믿음과 신뢰를 부여하며, 한번 시작한 사랑은 완미한 성취로 키워 내고야 마는 사랑의 능력자. 나는 그러한 사람을 실지로 기억 하고 있다.
물론 쉬은 일은 아니였을 것이다.
어려운 동반
사랑은 어려운 동반이다.
피땀으로 준령을 기어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신의 정의는 여기서도 위대한 공정성을 보여 준다. 인간에게 부과한 천명의 근본이 곧 이것이며,
아울러 인간 스스로의 양심에 게율이 되어 온다고 한 것이다. 사랑에서만은 결단코 불로소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불문율의 헐거운 율법일 뿐이다.
우매한 자는 사리에 아랑곳 없이 맹목으로 사랑을 흥정한다. 물론 그만치의 실패와 좌절이 꼭 기다린다.
오늘의 시류는 애정결핍의 심각한 범람을 실어와 있으므로 당연히 이 시대를 고칠 의사를 찾게 된다. 그는 여럿의 덕인 외에도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중지의 시대이다. 한 사람의 손에 국가의 흥망마져를 맡기던 역사는 지나가고 오늘은 여럿의 지헤와 땀을 원하고 있다.
후덕한 성푸, 뜨겁고 성실한 가슴을 원한다. 그러나 진실로 사람다운 가슴들이 몆이나 있는가 사랑의 사회, 사랑의 가정을 이루려 할때 무엇보다 이상적인 방법은 공평하게 덕업과 현실을 분담 하는 일일 것이다 . 하지만 책음을 못견디는 아우성이 이 사방에 소요를 일으킨다. 어째서 이다지도 무력하고 삭막한가 말이다.
하면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처음에 하려던것 , 마음에 잘 드는 산 사람을 선택하여 그를 사랑 하는 일이였다. 한 사람쯤이야, 그러나 내가 선택한 이상엔 자신을 가질만했다 그랬는데 결과는 과연 어어떤가 최소한 주례사 앞에서 서약한 부부사이야 안심일 태지? 열애에 빠진 연인들도 신용할 수 있을테지? 그날의 동지들도?
또 사랑을 가르쳐 준 스승도 많았었다 보배스런 지혜들을 한 그릇에 모아 담고 수원지의 물처럼 나눠 쓸 수도 있을 것이였다. 그리하여 사랑의 말씀들은 남아돌 만큼이나 수북하고 위대한 본보기마저 얼마든지 생겨났다. 종교와 예술이 앞장을 섰으며, 교육, 철학, 역사의 분야들, 과학과 통계학과 정치까지도 순밀의 꿀들을 부지런히
날아왔다. 어떤건 선험적인 예지, 어떤건 행동적 교훈 또는 에언적 권유 등. 그러나 이젠 수요가 흡쪽하고 사랑의 방법들은 터득이 잘 되어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지름길
"지옥이란 타인의 관계" 라고 사르트르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 의 성질을 줄이고 나의 확대를 애쓰는 일이 사랑의 지름길 이라고 풀이할 만하다.
내가 바라게 되는 일을 이웃에게 행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친구를 대접하라고 일찌기 성서에서 가르치고도 있다. 영환이 큰 사랑일 수록 사랑도 커져서
에수나 석가에 이르면 전 인류를 품안에 보듬었기도 하다. 우리는 비록 범상을 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애의 큰 바다를 지향하며 그 합류를 감히 꿈꾸어야 한다.
흐르고 있는 진행과정에 머물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인간적 긍지를 뒷바침하는 없지 못할 여건이다. 사랑하는 능력이나 사랑받는 자격은 모두가 인간성의 개화이며 인간의 진면목인 때문이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사랑은 있다. 이성을 그리워 하고 자식을 아끼는 정쯤으로 말한다면 사람과 동물사이에 다를바가 없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을 자초하는 사람의 깊히와 넓이로 훨씬 진화 되고 있어야 할게 아닌가. 여럿 중에서 선택한 특정인 외에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하며,
나아가 삼라의 모든 것을 축복과 연민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하리라.
사랑의 확산, 사랑의 정신화 내지는 영육의 바른 조화는 사람된 자의 기본 되는 명분일 것이기에 사랑의 추구, 사랑 속의 투신, 사랑의 고지에 이르러 보는 일이야 말로 인간의 보람이며 자랑, 또 지표라 할 것이다.
사랑의 회구는 모든이의 상정이므로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을 부러워한다. 사랑받고도 싶고 사랑을 내어 주고도 싶다. 나도 이 예를 벗어 나지 않는다.
내 경우에 있어선 사랑을 찾아 가는 긴 도정에 쉼없이 표현의 연습을 쌓아 왔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나이가 먹도록 서툴고 어리석다.
사랑의 언어를 찾고 찾으면서 사랑의 명함과 헤일 수 없는 봉별을 거듭 했었다.
어느날 문득 내게도 사랑의 흐릿한 윤곽을 만난 듯도 싶다.
아름다움
사랑의 언어는 사랑의 피부에 불과 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엔 곧잘 비상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주던 것이다. 내가 원한 사랑은 벌거벗은 언어, 함축에 감싸인 언어, 양쪽이 다 아름다운 언어 그리하여 등나무처럼 서로 감싸 안으며 커가는 바램이다.
때때로는 사랑의 현실이 빛을 출렁이며 몸을 드러 낸다. 잊을 수 없는, 마치도 감전 같은 충격이 온옴 전감관에 흘러 들어 온다.
묘하게 저리고 아프면서 눈물 나는 그 느낌이다. 뭔가 가슴을 쳐 오는 이때의 숙연감.
사랑을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좋았다. 사랑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얼룩진 피 멍을 삭일 궁리를 의론하는 일도 나쁘진 않았다.
사랑을 향해서 걸어가는 발걸음은 최소한 허무할 수가 없었다. 바라건대 긴 대열을 지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간다면 좋겠다.
사랑의 행군이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사랑은 무궁했다. 얼마를 길어 내도 그 풍요한 수량을 건드릴 도리가 없었다. 수심은 모든 깊이 중에서 최후의 깊이일 것이다 .
사랑은 영원한 피안인줄 알았었는데 거짓말처럼 이쪽 언덕이라 믿겨지면서 사랑의 해안선을 걸어기는 감격이 뿌듯이 치받아로르기도 했다.
사랑 안에 빠져들면 천지가 사랑일 뿐이였다. 서걱이는 바람, 흐르는 구름조차 낭랑히 사랑의 화신들뿐이다.
어림없는 착오, 어리석고 행복한 사랑의 흥분이란 말인가.
하긴 사랑의 어설픈 최면일 수가 있고 사막의 모랫벌에 불의 천의 자락이 너울대는 그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의 그것이 사는 대룩을 향해 머나먼 여로를 나는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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