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잠꼬대 1011

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 / 배용제 (낭송:고독한 낙서)

밤새 고양이가 할퀴고 간 쓰레기 봉투 안, 내가 헝크러진 채 쏟아진다 몇 장의 고지서이거나 구겨진 낙서 조각으로 또는 삼키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되어 역겨운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것은 살이 뜯긴 앙상한 과거이거나 버려진 기억의 나, 그러한 나를 간혹 꿈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낯익은 형상들이 모퉁이마다 뒹굴고 일그러진 표정을 가진 기억에 꿈은 축축한 땀을 쏟으며 한없이 어두워진다 꿈이 되풀이될수록 더욱 많은 내가 들어찬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곳으로부터 압착된 무수한 나는 천천히 썩어간다 꿈은 모두 악취로 가득하다 나는 연신 코를 막으며 삐져나온 것들을 봉투에 쓸어담아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다 묻혀야 할 흔적의 오수가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빛이 꿈의 벽을 할퀴며 지나간 아침, 얇은 꿈에 구멍이 나고 나는..

몽환적 10월 / 전혜린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 / 톨스토이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잘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자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개개인에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것, 즉 행복을 얻는 일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자기 개인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기가 바라는 행복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행복인 것 같이 생각된다. 그에게 실제 살아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존재의 생활은 자기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 같이 느낀다. 즉 그저 생명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생활을 그저 관찰할 따..

작가들의 글 2009.01.21

40대의 비 오는 날..... 박완서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 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

작가들의 글 200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