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5

ivre 2012. 2. 26. 22:07


아직 추위가 남아 글을 쓰려면 이 사내의 허리와 손이 시렵다.
언젠가  이런 글을 긁적 인적이 있다.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줄 지금 세상의 여자들,
그럼에도 신이 한가지만을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 여자를 갖겠다. 지헤로운 한 여자를

물은 물에 합치고 불은 불과 섞이면 더 타오른다지.
생명이 은성해 지는 징후, 더 자라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밝아 진다면 주위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여러 일거리, 전부의 자연물까지도 한결 뜨겁게 껴 안을 수 있고
갑절의 충실로서 베풀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느날 한 사내가 두 팔을 벌리고 겨울 바람에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이 더 많은 산으로 가는걸 보았다.
마치도 그 몸 시늉은 바람을 안아주려 가는것 같았었다.
그래 산에 바람이 많지.
도시가 싫고 사람에 지친 바람과 바람들이 저네들의 고향을 찾아 가는 그 고향이 곧 산이니까. 그 때 그 사내는 아주 조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사내. 오레 살아온 듯도 싶고 꼭 한번만 더 새로운 삶을 누리 고도 싶은 그 사내.
그 표장은 다시는 거리에 나오지 않을, 역력히 그런 표정이였따. 어느 계절의 어떠한 충동도 간망도 또 미혹이나 눈물도 지금은 그 사네에게 작용하지 못할 그런 표정이기도 했다.
그 사내의 좌절이 그 사내의 귀소본능을 깨워 본래의 자리, 자아의 동굴로 지금 그 사내를 데려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친 사내들은 모두 제 굴로 돌아 간다. 어떤 이는 거기세 영 나오지 않고 그러나 다른 사내는 또 다시 삶의 혼밥한 시장에 나올 것이다.

사람 하나는 얻는 일 그것에 불과 한것을 큰 뜻으로 삼았던 젊은 날의 과실이여.
고요히 입속 말로 외워 본다.

우리가 매번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 흩어 보내며 자주 상심하며 엎어지며 어둠 숙, 숱한 미혹의 긴 길머리에 서 있기를 잘 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유리감과 개별 의식을 갖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저마다 망망한 대양 가운데의 한 점 외따른 섬처럼 물길로 하여 사방이 젖어 오는 고절감을 깨닫기 쉽다 한들 엄정히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 적지 않이 과장된 비극심리를 찾아낸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우리는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아니, 사실은 모든이가 다 혼자이기 때문에 우리중의 아무도 "홀로" 의 조건으로 동립될 수는 없다고 하자.
우리는 때때로 더 현명하기를 바라지만, 실지론 현명에 앞서 이해와 용납을 갖고자 더 많이 애써야 할것 같다.
가장 목마른 기대 앞에 서 있을 때라도 쉽사리 성취를 부여 받기 보다는 그래도 얼마쯤 기다림의 넝굴을 뽑아 올린 다음, 경건히 그 품안에 보람진 간망을 받아 내는 이가 된다면 더욱 기껍지 않으랴.

우리의 손에 쥐어 지는 잔들 ........
달거나 쓰거나 간에 그것들에 대해 신실로 속속들이 감응 하는 심정도 있음으로 하여 정녕 생명은 어여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떄문에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은 충분히 쓸모 있었으며 쓸모 있는채로 하나씩 우리에게 시사되어 주어진 일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씩 이 기쁨 앞에 경탄한다 해서 잘못됨이 없을 뿐더러 진실로 생명 이것으로 해 골몰히 도취 된다 해도 역시 추호의 그릇됨이 없을 것 같다.

아직도 덜 배운 감사, 그리고 서투른 애덕과 인색한 허용을 지양하며 더 어수룩하고 어질고 겸손하고 마음 느듯해 있지 않으면 안 되라리 싶다.
득실에 과민하기 앞서 유연하며, 스스로 깊은 내심안에 노상처럼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