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생명의 斜線

ivre 2012. 2. 2. 22:18






돌이커 보면 정녕코 부조리의 사태뿐
우선 사람에겐 정신의 기갈보다 육체의 기갈이 한결 더 절박하며, 슬픔보다 오욕이, 오욕보다 한치 절박한 공포가, 더 강하고 몸서리쳐진다고 할 때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당신들은 그 어느쪽의 죄석에 있었는가.
내 육체는 여직껏 굷주린 일이 없다.  공복과 기갈이 그리고 혼란의 나라, 삼순구식(三旬九食) 이란 말 마저도 흔하게 쓰여 온 나라에서 내 육체는 내 육체는 한번도 굶주린 일이 없다.
내 정신도 촌각이 가파로운 불안의 밑바닥에 끌려 다니며 수모와 저항에 참담히 뇌수를 자극한 일이 없어 왔었다.
나는  삶의 준령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게 닥처온 곤혹이란 고작 감정의 용량을 흔들었던 그것이고 거기따라 높은 소리의, 얼마간 과장된 절규를 자아낸 데에 불과했었다.
반이 체험이면 나머지 반은 가체험의 환상을 보테어 이를 한 그릇에 모았다고 말해야 할것 같다. 궁색한 체험과 헤픈 표현이 겨우 합쳐서 그 한 그릇을 채웠던 것이라고,
그러나 어차피 나도 인간이 사는 땅의 준령과 계곡과 자잘한 주름살까지 모든 지열을 다 알게 되고 살고 죽는 일의 그 속깊은 외포를, 이를테면 가치와 무이미의 상극, 솟구치는 신망과 실의 속의 추락에 대하여도 낱낱이 이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여럿이서,
혼자서,
여럿 속의 혼자와 혼자가 모은 여럿의 역관계를, 그 인과와 소명과 연민 속의 봉별을 낱낱이 이해 하며, 소아적 안목을 벗어나 성인적 신견의 단층들을 살펴 헤아려야 하리라.
자칫 어린이의 미숙에 떨어져 허위적거리게 될 지성의 위태한 고비를 한사코 경계해야 한다고 알아야지.
사실이 그렇다.
중지 위에 그림자를 떨구는, 한 조각 높은 예지를 되도록이면 얻어 누리고 싶은 그 목마름.
아니지.중지에 참여 하는 한낱 밀씨의 총명, 정녕코 부스러기의 총명이나마 가진 자가 되어야지.
어져면 또다시 사랑의 희구가 격정가운데 깃을 펴 올릴지도 모른다. 더 쓴 시련과 더 서러운 비애를 향해 두 팔을 높다랗게 창공에 추켜 올리기라도 할까 보다.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까보다.
삶의 미각의 온갖 체험을 실지로 익힌뒤, 나의 감관에 대답해 오는 갖가지 삶을 보다 속속들이 음미하게도 되어야지.
맛과 뜻의 모든 진정히 내 감관을 열어 둘때 삶에 따라 오는 모든 감동은 한결 깊고 진하고 놀라운 밀도를 제시해 줄것도 같다.
그맇다. 나는 위의 일들을 의심치 않는다. 
실로 그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열정에 치받치며 말도 헷깔리는 높은 신열로 지금 이렇게 있음이려니.
주제를 헤집고 주제의 속살을 갈라 보는 사람들 중에 나도 언제나 함께 있겠다. 다만 서슬도 프른 해부도를 손에 쥐고 질과 용량을 과학의 방법으로만 분석하려 하는 , 그런 차가운 처소를 택하진 않을 것이다.
정신의 영역을 거치며 인간적 자각의 증계를 차분이 밟아  올라 가는 이들, 저들의 손엔 흙으로 구운 작은 기름등잔이 불을 담아 있으며 배례와 묵상으로 타오르는 그 불빛은 프근하고 은은한 도심의 부르고 있으리라.
내겐 부조리가 많다.
갑자기 무의미해지기도 불시에 감정이 식어 버리는 일인들 자주 생겼으며, 마음을 다 털어 주었기에 비어 있게 되는 그 허전한 공막감에 대하여도 이미 썩 잘 알고 있다.
속단 때문에 포기 하게 되고 내 멋대로 비참해진 때도 있었다.
벼려진 사실도 버린 사실도 없는 상황에서 나 혼자의 어림짐작으로 조급한 종지부를 찍고, 내 멋대로 못견뎌 울고 앉은 때도 있었지.
조금만 더 가면 되는 도달의 직선에서 그만 전진을 담념해 버리던 일.  한껏 기다렸으면서 막상 그 시각에 이르면 꿈을 깨듯이 집착해서 손을 놔버린 일은 또 무엇이였을까.
정말이다.
나는 곧잘 나 자신의 우매, 그 우둔한 무게에 짓눌려서 미칠것만 같았었다. 버릴수도  바꿔 올 수도 없는 나라는 존재, 이 숙명의 권태에서 으뜸의 선처를 끄집어내는 일이란 결국 서서히나마 나 자신을 고쳐 훈육하는 일이며 끝내 이를 포기 하지 않는 그 한 가지임을 알아야지.
몇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는 그런 영광조차 없는 운명의 자아, 이 시종의 부담을 내 두 손에 어렵게 받쳐들고 나는 마른 땅  흙 먼지 속에 무뤂을 꿇는다.
자아의 고질.
우리는 모두 이 난제에 머리르 싸매는, 궁색한 답안자의 한 무리라 하겠으며 어이없게도 컨닝을 하고 싶은 충동조차 일건만, 누구의 답안도 특별히 잘 생겼을것 같진 않다.
후우, 취한다.
니미럴 몹시도 춥군.
삶의 한 발 앞에 찾아 오는 예감과 삶의 창공 그 무량한 청색에의 목마름, 이 전후의 균형은 또 어떻게 잡아 가느냔 말이다. 좆같은 감정이다.
한 사람이 문을 열면 모두가 들어 갈 수 있을테지. 하나의 개체가 질서 속에 수습되면 나머지 모든 이도 그 비방을 얻어 와서 결국 전부가 해결될 수도 있겠는데.
오늘은 그만 써야 겠다. 취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