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91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 (배경음악 Danielle Licari - Et Maintenant)

밤새 고양이가 할퀴고 간 쓰레기 봉투 안, 내가 헝크러진 채 쏟아진다 몇 장의 고지서이거나 구겨진 낙서 조각으로 또는 삼키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되어 역겨운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것은 살이 뜯긴 앙상한 과거이거나 버려진 기억의 나, 그러한 나를 간혹 꿈속에서 만날 때가 있다 낯익은 형상들이 모퉁이마다 뒹굴고 일그러진 표정을 가진 기억에 꿈은 축축한 땀을 쏟으며 한없이 어두워진다 꿈이 되풀이될수록 더욱 많은 내가 들어찬다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곳으로부터 압착된 무수한 나는 천천히 썩어간다 꿈은 모두 악취로 가득하다 나는 연신 코를 막으며 삐져나온 것들을 봉투에 쓸어담아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다 묻혀야 할 흔적의 오수가 흘러나온다 날카로운 빛이 꿈의 벽을 할퀴며 지나간 아침, 얇은 꿈에 구멍이 나고 나는..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꿈의 잠언 (배경음악 Aine Minogue - Fyvie Castle)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들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욕망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배경음악 Ancient Cultures - Solitude)

TV에서 본 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 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

시간에 대한 우의 적인 단상.. 박이도

새해를 맞는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되씹기도 전에 부음 한 장이 전해졌다. 한 인간에 관한 마지막 전갈이다. 새해를 맞는 것은, 기쁨보다 무엇인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의 표정처럼 나 스스로가 애처롭게 보인다.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허무 때문이 아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잡다한 상념 때문이다. 새해를 맞는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우리는 기쁨이나 희망의 미래 지향적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인생의 덧없음이나 좌절의 감정에 빠질 수도 있다. 새로운 꿈이나 이상을 설계할 때 새해는 손꼽아 기다리던 열려진 시간이 된다. 그러나 새해라는 하나의 마디를 풀어 버리고 잴 수 없는 과거에서부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미래까지의 시간 선상에 하나의 흑점으로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의식할 때..

작가들의 글 2009.01.11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작가들의 글 2009.01.11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미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작가들의 글 2009.01.11

권태..이상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

농부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몽환적 10월 ... 전혜린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난로를 때고 앉으면 독서..

작가들의 글 2009.01.11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 톨스토이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잘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자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개개인에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것, 즉 행복을 얻는 일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자기 개인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기가 바라는 행복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행복인 것 같이 생각된다. 그에게 실제 살아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존재의 생활은 자기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 같이 느낀다. 즉 그저 생명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생활을 그저 관찰할 따..

작가들의 글 2009.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