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가버린 그러나 다시올 겨울새의 날개에게 (배경음악 child of the moon - mandragora scream)

ivre 2010. 4. 19. 20:50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겨울 하늘을 높히 날 수 있어야만이 진정한 새라고. 날개 끝에 무수히 바늘 꽂히는 냉기를 떠받고 바르며 아름답게

몸의 평형을 지탱하며 나는 그 유연한 날개짓.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아득한 공중을 날아, 눈 덮힌 준령을 넘어 오는 새들의 날개짓, 하기야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눈떠 있었을 그 날아 오름이 혼백을 누가 막을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야 할 바가 있다.

새들은 그 나름의 전역을 다해 날고 있으며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저마다 혼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 공통점에 목숨을 지니는 자들의 뜨거운 공감이 있지 않으랴.

천진암 깊은 산중에 한 수도단체가 들어서게 되면서 연수한 수녀 한 분이 힘겹게 서울을 왕래한다. 하루에 한번 왕복도 벅찬거리인  걸 두번을 다녀갈 때가 있다고 하며 사라들은 쇳덩이 같은 건강이라고 놀라지만 본인의 표현은 더 단순하다.

"사력을 다 하는 것이지요"

단지 이 말뿐이다.

이렇듯 새들도 그들의 사력을 다하여 겨울 하늘을 날고 있었을 것이다. 망망대해 같은 공중에 날개를 쉴 나무 한 그루도 있을턱 없다. 두껍고 거대한 빙판을 가슴과 날갯죽지로 쾅쾅 깨뜨려 내면서 필사의 비행을 하고 있을 것을.

생명을 누리고 있는 그 누군나가 삶의 값을 치르며 산다. 토큰(아니지 요즘은 신기하게도 지갑을 드리 대면 삐 하는 소리와 함께 갑을 치루는 광경을 간혹 본다. 처음에 난 그 광경이 몹시도 놀랍고 그 지갑속이 몹시도 궁금했다. 한번은 우연히 시내버스 탈일이 있어 전에 보았던 그 관경이 생각이 나서 나도 내 지갑을 이상한 물체에 대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아저씨 요금 안내세요" 아뿔사 내 지갑으론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없는건가 보다 하고 얼굴이 빨개져 돈을 지불한 적이 있다).을 내고 버스를 타는 일이나 혹은 먹은 후에 샘하는 점심값이라 할지라도 필연코 댓가를 지불하기 마련이며, 이에 있어 더욱 중요한 건 삶이란 과연 그 이상의 값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이 때의 그 믿음이다.

한 알의 곡식이나 한 송이 꽃도 강렬한 의지와 전폭의 투신으로서만 바꿔올 수 있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한량없이 빛부시다 하지 않으리.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생명의 탄력......

새해가 온지도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겨울새의 날개위에 실려 왔겠기에 우리가 지상의 창문을 열고 이를 맞아들일  땐 싸한 눈송이부터 부슬부슬 떨구었던 것이다.   시린 손끝을 타고 퍼져 감도는 온몸의 냉쾌감과 깊히 머리 수그리게 하는 삶의 威抛 ........

저마다 한장씩 백지를 받아 든다.

새삼 놀랍거니와 이 분배는 만인에게 공평하여 더 받거나 덜 받은이가 없을 것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저마다의 재량으로 쓰되 날이 저물면 사람들은 그날의 수확을 살피는 평가와 성찰의 저울대 위에 선다. 이때 각자의 양심은 조심스럽게 그 눈금을 지켜본다.

삶의 두려움이여

그러나 이만한 긴장과 드릴도 없고서야 무슨 맛인가 말이다.

칼날 위에서 춤추는 무당들은 이따금 저들의 작두날을 손 보는 것인지?

검객들은 찬물을 끼얹으면서 숯돌에 칼을 갈아 가히 이슬떨기가 맺힐만큼 영롱하게 도신을 보존 하는 것인가?

우리도 그처럼 오성의 거울을 닦아 가려진 영혼조차 환히 얼비치게 해야 할 것이리라. 정령 그럴 것이리라.

삶은 동반 이라고 거듭거듭 생각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준령에 오른다. 올라가는 어려움 못지 않게 내리 구르는 추락도 그 자신이 용랍할 수 없는 터이고 보면 그야 말로 진퇴양난의 난감한 행로이다. 사람은 더 낳은 자기를 끝없이 갈망하며 기록을 깬 운동선수조차 또다시 기록을 갱신하고 싶은 불 같은 묙망에 사로잡힌다.

끝도 없이 자신의 충족을 탐내는 강한 집착으로 하여 눈과 얼음의 길을 걸으며 한더위 불뼡 속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녕 이상도 하다. 삶에 있어선 줄기찬 상승본능을 도저히 떨처 버릴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새처럼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 이 한정 안에서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사는 되풀이를 거듭한다.

겨울엔 햇빛이 흐리고 사방이 황량해 보이나 기실 겨울처럼 성숙하고 용사적인 계절도 다시 없다. 마치 점화의 준비를 갖추어 두고 잠시의 유예에 머물고 있는 불의 축제에 비할 수 있다.

땅 속이나 바다속에까지 불심지들이 꽂아 두고 있으며, 언제라도 세찬 불기둥으로 솟게 할 수 있는 기름탱크 옆엔 성량이 마련되고 성량골조차 이미 벗은 몸으로 나와 있다.

그러면서 침묵한다.

강한자의 영보와도 같이 저력 있는 침묵 앞에서 우리는 새해의 설계도를 펼처 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4계월 여가 지났다.

땅속은 생명들의 충전으로 숨가쁘고 바깥은 이리도 고요한 이시절의 교훈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새해를 설계 했던 것이다.

허약한 손과 미숙한 사념으로, 그러나 감히 순백의 석고판 속에 염원한 서약의 글씨들을 다시금 새겨 넣는다.

"삶의 보람은 알프스의 바위 틈에서 겪는 에델바이스" 라는 말을 새삼 곱씹어 보면서 말이다.

자신이 행복한지 어떤지는 묻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함께 있는 사람이 행복한지 어떤지는 살펴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런 말이 새로운 의미를 곱씹는다.

괸계 사이의 지혜야 말로 얼마나 어렵고 목마른가. 관계의 선은 곧 나의 "개선" 에서만 가능하겠으며 "나의 개선" 이란 온세계의 개선 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움을 어찌 할 것인가.

저만치 가버린 새해.

눈부신 한장의 백지를 받아 놓고 손을 씻는 심정이랄까..... 눈을 감으면 이대로 기도가 될것 같은 허심이요 무력감이기도 하다.

오늘이 이 봄날 풍경 같기도 깊은, 침잠하면서 그 안족에서 순열한 불씨를 하나씩 마련하는 한해이고자 염원과 결의를 저4층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을 소리와 함께 다지는 외엔 다른 아무것도 없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