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치기가 늦도
공연한 허세, 즉흥적 선심, 죄없는 자만심 등 어린애스러운 취미가 많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데에 사내의 천진성이 있고, 여자에게는 찾아 보기 힘든 수더분한 온유를 찾아 볼 수 있을것 같다
고백하자만 사내의 성품은 취약하다 우선. 남자들이 취하는 방어엔 반드시 한두 헛점이 있다. 그래서 여자들이 무서워하지 않는건지도 모르겠지만 (훌쩍) 사내는 사실에 있어, 여자 보다는 훨씬 무섭지가 못한 족속이다. 아무리 사나운 분노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얼마간의 유예만 주어진다면 반듯시 그 노여움의 한 귀퉁이를 뜷어 놓을 자신이 있다라고 대다수의 여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가만보면 여자에겐 비결이 있나 보다. 그러니 저리들 기고만장하고 있지 않은가. 슬픈일이지만 말이다... ㅠ.ㅠ
예컨대, 항거로선 사내의 기를 꺾을 수는 없지만 달래면 꼭 효험이 생기기 마련인가보다 (내 경우가 그러한걸 보니 말이다) 여자에 비하면 훨씬 근본의 소통이 가능한 이가 사내들이라고 여겨진다 자존심을 돌봐주고 처해있는 인간적 외로움을 진정히 공감하는 입장에 있어 주면 남자들은 순하디 순한 우리 속의 맹수가 되어 버린다.
여자들이 항상 사내에게 지는건 저들과 적대하기 때문일게다. 싸우려 하지 말고 이쪽편에 끌어 넣으면 지극히 손쉬운 무전승, 그 결과 풍성하면 피차가 가까워 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라 다른데 있다.
사내는 삭막한 열정 부단히 남자를 갈망하게 되는 감정 때문에 여자는 노상 상처를 겹치도록 마련이다. 여성의 욕구는 언제나 부풀어 있는 상태이며 항상 누군가를 옆에 두고자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한 사내를 사시사철 옷고름에 붙잡아 매고 싶었을 것이고 사실이 그럴 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여성은 하나의 왕국을 차지한 이상으로 행복했으리라. 여자에겐 의탁의 본능이 있고 이것이 끊임없는 욕구를 부채질한다. 의탁과 소유는 한가지 욕망, 여자가 여기에 굶주리면 무참히 파괴될 수밖에 없다. 여성의 급소는 바로 그 곳이다 라고 생각한다.
어제본 사람을 오늘 또 찾게 됨은 여자의 상정이요, 사내는 오히려 일에 더 끌리고 잡다한 용무에 관심을 쪼개어 쓰려 한다. 여자는 묶고자 하고 남자는 풀려나려 애쓴다.
여자는 무섭게 집중하고 남자는 이런일이 숨막히다고 생각한다. 양자의 비극은 여기서 그 양상이 갈라지며 어이없게도 사내의 고독이나 여자의 고결감이 모두 이 점에서 빚어 진다는 점일게다.
여성의 열정은 쓰임없이 누적되어 점차로 퇴색이 오고 허무하게 빛바랜다. 과민이나 히스테리의 증상 에서 생겨 나기도 한다. 담을 곳 없는 "갈구" 그건 여성에게 쉽사리 삭막한 감정이 된다. 이미 저들이 일으켜 주는 연착은 담백한 감미가 아니고, 오뇌를 섞어 넣은 과중한 시련의 쓴 맛이 된다.
지금은 건조한 번뇌,
때때로 이 안에서 생명의 절규가 울려 나온다. 심할땐 그게 곧 비명이되고 ...
아!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사내역시도 목마르고 배고프다는 점이다.
저들(여성)이 거부 했던건 결코 모정(慕情)이나 간망(懇望)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기피는 구체적으로 말해 곧 여정(女精)의 탐욕이기 때문이다. 더 자유롭게 해 주면서 사랑해 주고, 좀더 큰 시야에 담아야 이해해 주는 가운데 넌지시 너그럽게 다루어 주었으면 했을뿐이다.
따지고 보면 사내가 얻고 싶던 것과 여자가 주고자 했던것이 그 차이는 별반 대단한게 아니다. 원인에 비해 결과가 엄청나게 불행할뿐이며 실은 양편이 만족할 수 있었던 처지에서 둘이 다 괴롭게 되어 버린, 차질의 비극을 지적해 마땅하리라.
사내에겐 한사람의 천사와 치한이 함께 들어 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이 양면성의 비례가 다르며, 집착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뿐이다. 물론 여기에도 어느 정도 원칙이 있을것이다. 첫째로, 사내이 사랑 받으며 사랑해서 배부를때 행동의 조심성은 한결 줄어든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내는 우선 안정감을 풍긴다. 허덕이지 않으며 함부로 식욕을 깨워내는 일도 드물다. 사랑 받는 사내는 그만큼 매사에 자신을 가지며 저력이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유창한 계획을 좋아하고 미래를 밝게 받아 들이는 태도를 취한다. 함부로 자기를 내어 굴리는 일을 삼가며 각박한 속단을 되도록 피해 가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감춰진 잠재 의식속에 치한의 충동을 다소간에 꼭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품질이 보장된 고급 과자를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어린이가 먼지를 뒤집어 쓴 장터의 엿가락이나 보기에도 그다지인 번데기를 사 먹고 싶어 하는 그런 심리와 흡사할지도 모른다.
하나를 이미 가졌고 그 하나에 만족한다고 스스로를 믿으면서 은연중에 다른 하나를 더 바라는 사내들의 몰염치 ㅠ.ㅠ 이렇게 되면 소유를 아끼고 비장품을 간작하는 그 격조에서 사내들의 품위는 별 수 없이 저락한다.
그렇다 사내은 기실, 모순의 동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내의 욕망은 설익고 성급하며, 감흥을 맛보고자 하는 그 촉각은 헤아릴 수도 없을만큼 매우 많다. 이 점 여자들이 귀중품을 깊이 비장하는 성질과 매우 대조적인 바가 있다. 사내의 욕구는 끓는 물과 같이 매우 소란하다. 부산히 솟구치고, 화약내음조차 풍기면서 한편으론 내부에서 이미 분열하고 있다. 욕망의 과열이 욕망의 혼돈을 불러오고 이 때문에 그 욕망을 단명하게 하는 수도 많다는걸 나는 많이 봐왔다. 좀더 좋은 예를 들더라도 욕망의 타성을 통해 욕망을 이온화 시키는 결과를 흔히 가져온다.
진격이나 정착에는 그 적기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쟁취로써 얻은 것 외에도 보존으로 누리는게 있겠는데 사내의 욕망은 하나같이 급진적이고 돌격적이면서 한편 그 뒤끝이 허약하기만 하다. 사내는 줄기찬 여정에 내달리는 사철의 철새인 듯하다. 그 비상은 지칠때까지 계속되고 노는 날 날개짓이 멎을때 이미 남성의 삶도 저녁 어스름으로 접어든다. 그 밤은 무섭게 적막하고 삶엔 결국 만족할 만한 안주지가 없더라는 따위의 비겁한 철학을 여기도 하니까 말이다.
또한 노경의 무료는 여자보다 사내가 한결 심각하며 날마다 얼마큼씩의 아내의 옛푸념을 참아내는 인고를 쌓기도 한다.
남성은 능동의 기맥, 그것으로 역사를 추진해 나간다고 본다. 남자의 의용, 활달, 장대(壯大), 준엄, 이상, 및 투신의 근본이다. 문화를 창조하고 국방을 전담하고 자연까지 개조한다. 가족을 위해 침식을 보장하고 사회기구를 정비한다. 동시에 남성은 유하다. 치기속에 슬기를 감추며 때때로 비상히 과민하고, 섬세하고, 유순하기까지, 여성적 성향의 일면을 또한 지녔다고 본다.
남자는 여자에게 숙명의 견인이다. 무조건이다시피 여자는 남자에게 끌려들때가 있다. 거리에서 멋있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 한참 동안 즐겁다. 초행의 먼 길을 가는 기차속에서 교양있는 여성과 함께 앉는것도 좋지만 품위있는 남성과 동석하는 쪽을 더 택하고 싶어 하는것이 여자의 마음이다.
저들중의 하나가 진실한 연모를 불붙여 일으키면 여자는 정신없이 불타오른다. 천지가 현격히 달라지며 일체의 가치 기준에도 역력히 변화가 온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여자들은 능히 땅끝까지도 간다. 남자들이 자기의 포부나 야망에 미친듯이 붙잡혀 들어가는 그 이상으로 여자는 자신의 사랑에 남김없이 쏟아 붓는다. 다른일체의 것을 돌보지 않을수도 있을만큼......
그 집중은 비길 바 없이 열정의 통합인 것이다.
남자는 거역할 길 없는 마력으로 여성을 잡아끈다. 반드시 그 값어치가 높아서만도 아니다. 오직 그들이 일으켜주는 말도 못할 사랑스러움 때문에 여성은 마력의 그물에 사로잡히는 수난의 나비들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 기쁘게, 호접이 된다.
남성은 근본의 인인(隣人 이웃사람) 이다
남성이 옆에 있으면 무턱대고 마음이 훕족하다. 느긋이 남성의 허벅지를 비고 있을때 여자는 태산에 기댄듯이 마음이 든든해질것이다. 이미 조금도 춥거나 외롭지 않으며 하등의 부족도 없이 된다. 이때의 충족과 넘치는 위안은 부드러운 양모처럼 그녀의 전심신을 쑬어준다. 그녀는 젊어 지고 몰라보게 아름다워진다.
저들을 따라가면 먼 길도 가깝고 또 반대로 얼마 안되는 길이 궁극의 도정 같은 깊은 뜻을 갖기도 한다.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는 나날이 신선한 매력으로 채워지고 무한정으로 향기로울 수 있다. 세상에 남자가 없었다면 여자는 그 심신의 미를 노을같이 갈망하지 않았을것이고 여자가 품어 주지 않았더라면 남성은 결코 오늘처럼 활력에 넘칠 수가 없었을것이다.
서로를 보완하는 이 성질에 남자와 여자의 참관계가 있다고 본다. 때문에 미움이 빠져서 조차 좀체 갈라서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랑할땐 사랑속에 마주보며, 미워지면 또 미움으로 맞서는 여기에 남녀의 현실, 성(性)의 불가피가 있다고 보여진다.
남성은 궁극의 긍정이다. 자네들의 방문을 맞아 문을 열고 공손히 들여 앉힐 때, 여자는 처음으로 성숙기를 맞는다.
남성을 돌려 세운 여자의 삶은 그래서 완전할 수가 없다. 이 점 남자도 동일하다.
그래서 피차간에 반려란 말을 쓰게 되었으며 사실상 삶의 절반을 저 편의 손에 의존하고 있다.
으뜸으로 축복받은 반려에서 비롯해 최악의 반려에까지, 실로 천차만별의 생태를 드러내며 예서 파생되는
뼈아픈 인간사(人間事)는 너무나 다양하다.
또한 이 성질 안에서 괴벽의 여러 응석을 부리기도 한다. 예컨대 남자들은 번번히 탕자를 자청하고 나온다. 남자은 실없이 먼 곳을 유랑한다
불시에 가출하고 제 멋대로 돌아 온다.
외형으로 봐선 생활의 틀이 별반 바뀌지 않았다고 할 때도 저들의 마음은 천리 이역을 서성이고 다니는 일이 흔히 있다.
정해진 좌선에서 이탈한다.
여인들은 떠나 간 사나이를 찾아 나선다. 그길은 아득하고 사정없이 비탄과 수모의 찬 바람이 불어 닥친다. 금시 미쳐 날 지경이다.
그러나 실의의 막바지, 체념이 몸에 익어 겨우 편안해지려는 그 무렵쯤 하여, 떠났던 남자가 갑자기 돌아온다. 정녕 어처구니도 없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결국 다시 받아 주고, 새로운 기대로써 이번엔 더 단단히 당부를 건네 놓는다.
그러나 같은 일이 또 생긴다.
아픈 세월, 고쳐지지 못하는 상처의 실감이 절절히 사무친다.
용납의 지혜는 결단코 쉽지가 않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배신도 허무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는 오성(悟性)이 뒤늦게 여심의 눈을 뜨게 한다.
여자로선 참 쓸쓸한 노릇이다. 이젠 삶의 시간이 얼마 남겨 있지도 못하다. 그럭저럭 한 세상을 산다고, 조용히 끄덕인다.
그래서 결국 남성은 궁극의 긍정이란 말이 나올 수 있다.
여자의 삶에서 남성은 시초의 열망이며 온갖 곤혹의 누적 끝에 마침내 저들은 최후의 집착이 된다
남성과의 해후는 바로 운명과의 만남이다.
한 특별한 남자를 만남은, 곧 특별한 운명에 부딪치는 일이 된다.
명작이나 명화에서도 무수히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그건 고도한 예술적 통일성을 짚어 내고 있다. 대체로 그 사연들은 매우 애처로운 신고(辛苦)를 동반하고도 있었으나, 사람이 더욱 사람답고자 원하는 인간적 의지의 발현이라고도 할, 사랑과 헌신의 기록들은 무섭게 엄숙했다. 사랑과 도여에서 그 충실을 다하는 인간적 연소(燃燒)의, 처연한 아름다움, 그건 몸서리쳐지는 충격이요 좀체 그 기를 꺾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인간의 좌절과 그 헤아릴 수도 없는 반복은 결국에 인간끼리의 아량과 결속에로 넘겨 주기도 한다.
여자들은 이러한 능력에 대해 뜨거운 회구를 바치며, 그녀의 빈객을 이 원리 속에서 후하게 영접하고자 한다. 남성관이 밝고 긍정적인 여성은 삶의 태도도 명
쾌하고 또 의욕적인 처신을 할 수가 있다.
한국은 흔히 그 어머니들로부터 남성 불신의 관념이 주입되었기도 하지만, 이러한 전세대적 방식을 떨쳐 버리고 푸근한 신망과 나날이 청신한 애정으로 남성들을 후대함이 좋을건 물론이다.
저들은 이방인이 아니다.
남성은 여성의 영육에서 다시 없는 형연이요,절대의 선리(善隣)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소의 이질성을 가졌긴 해도 그 근본에 있어선 거의 흡사한 원천적 성질에 속해 있다.
서로를 버리지 말고 극진히 돌보는 이상엔 양 쪽이 다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는 약속을 신께서 주시었다.
일부 부정적인 철학처럼 사람의 삶을 암담하고 절망적인 것으로만 보고 싶진 않다 . 가면 무도회의 밤처럼 얼마간 그 정체가 모호한 남자들이 섞여 있는 점도, 생각키 나름으론 조물주의 다양한 섭리 라고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남자가 획책하는 죄에 있어선 그것이 천지를 뒤집어 엎을 만한 것이더라도 쉽사리 공모자가 되는 여심. 살인자를 치마폭에 감싸고 싸우는 그러한 무지마저 여자의 핏속에, 많건 적건 꼭 있다.
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남성은 저 세상에서나마 어김없이 꼭갖겠다고 다짐해 두는 여심의, 웃지 못할 환희(幻戱)에 대해 저들 남성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남성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고, 때문에 사람의 높은 긍지에 눈떠 인간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별반 그렇지가 않다. 저들은(사내) 여성의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생겨 났으며
여성들 역시 자네(사내)들의 친구가 되려고 세상에 태어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게 된 날 여자는 그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비로소 속속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저들이 가지는 전인적 영토 중에 여인에게 요긴하지 않은 건 한 가지도 없다. 그 죽음까지가 인간적 묵상의 처참히 아픈 선도체가 되어줌을 어찌 말하지 않고 배길 것인가.
살아 오는 동안 욕망도 바뀌고 가치관의 변천도 적지 않았건만 도무지 달라질 수 없는 것이, 오직 사내에의 연착이다.
무엇때문인지를 다 말할 도리는 없겠으나마 남성들은 다시 없는 보관이요 이름이 다른 또 하나의 신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심지어는 살의에 시달리리 만큼의 격분에 휘말릴 때도 결정적으로 그들을 버릴, 그러한 용단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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