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쓰는 흐린 낙서 (배경음악 10.000 Maniacs - Dust Bowl)

1. 10.000 Maniacs - Dust Bowl.mp3

만조 되어 기슭에 돌아오는 물처럼 세월의 백사장를 쓸며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물을 앞질러 먼저 해안에 드러눕는 가을, 큰 키로 일어서면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다
천지간에 수북이 담기게 된 가을이 나의 온 몸에 청량한 물방울을 끼얹는다. 머리를 감아 빗고 전축 판을 올리는 기분으로 파일을 틀어 본다. 해이에 얹혀 출렁이면서 오는 음악의 범람 이내 젖어서 젖어서 못 견디게 된다. 이 물줄기를 타고 아무 전류나 와 버리면 어쩌나? 삽시의 감전으로 온 세상의 가을이 모조리 불 붙으면 어쩌나? 해마다 첫가을에 간직한 색칠을 하듯 계절의 설레임이 번져 오곤 했는데 이 때문에 병이 또 깊어 지면 어쩌나?

갈수록 내 감정은 익어가고 달가와져 너무나 쉽사리 선정의 전기줄에 감겨 버린다
두 손을 활짝 펴, 박제의 나비 표본 모양 유리창에 밀착시키면 명주실 오리 같은 손금바다에 창 유리 속으로 수혈처럼 전열이 흘러든다.
벽을 타고 이 낮은 천정에도 퍼져 돈다. 스레트 지붕 꼭대기에 이르러선 잘 달군 철사같이 찬 밤공기를 쑤신다.
세삼 소스라치게 되는 광막한 허공, 이 안에 지금 메아리 치며 퍼져 나가는 한 호명이 있다.
"님이여"
이렇게 발음하게 되는겐지.
모든 이름이 들어 있고, 모든 이름을 지나서 넘어가는, 이건 필시 사람들이 자기의 본향을 향하여 먼 타향에서 외쳐 보내는 기억의 뜨거운 절규일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먼저 세상에서 먼 훗세상에까지 줄곧 머리카락에 묻어 다니는 바람도 몆 오라긴 있으리라 그림자도 몆날쯤은 있으리라.
사람인들 아마 세번 세상에 거푸 연분 있게 될 누군가 특별한 한 사람이 꼭 있을 법하다.
"님이여"
하면, 이는 그를 부르는 이름이 틀림 없을 테지. 지등에 불을 밝혀 들고 이 가을엔 그 사람을 찾아 나설 필연에 묻는다.
그래, 정녕코 그를 찾아 가야지.
정녕 누구라도 다 간다.
기다랗게 줄을 이으며 아득한 길머리를 한없이 간다.
잠잠이 그저 간다....빌어먹을...

이 아득한 대열에 대해 혹시나 태초의 할배 할미가 부르신다면, 간망의 먼 수로를 여는 사람의 은하라고 대답해 드리지.
뒤의 물살을 이어 끝없는 물결이 더욱 이랑져 굽이치는, 흰 띠 모양의 다함 없는 수량. 가랑비 오듯이 밤 이슬이 내리면 만상이 고이씻겨 동터 오는 새날의 한결 더 정결하게 열리리라.
왠진 몰라도 올해의 가을은 유달리 더 길고, 기조의 뼈대부터가 휘기한 염원으로 채워져 있다. 아주 먼 데서 돌아 오거나 아주 먼데까지 찾아 나서는 따위, 전에 없이 담대한 단안이 눈물겹게 치받아 오른다. 그러면서 더없이 굳센 지향으로 뭉쳐 작열한다.
그렇다
더는 참을 수 없는 바람과 격정의 파열인듯싶다. 오랫동안 경건히 가꾸어온 만남의 농경에서 마침내 완숙의 과일을 거두고 싶은 열망 그래야만이 정녕 신의 승락의 두 팔 안에 비로서 마음놓고 안겨 들 수가 있겠기에.

길벗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에겐 이미 태초에, 사람끼리 길벗이 있으라는 축복이 있었다.
한 사나이에겐 한 여인을 짝지어 백 년을 해로하라 하시였고, 형이 있는 다음엔 아우가 출생하여 형제를 이루도록 바라시었다. 이 범상한 기본에서부터 이미 길벗의 원리는 비롯한다고 보겠음을.
지아비를 위해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사랑과 헌신의 영원한 청탑을 쌓으며, 또한 어버이와 자식사이에도 이 성질은 놀라운 깊히로 진척되어 간다. 이는 모든 혈연을 따르는 인간 관계려니와 선택을거쳐 각별히 맺은 후천의 길벗도 있음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연인들과 둥지가 그렇고, 모든 이웃 사이가 다 이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누구의 진정한 길벗인가. 이를 참으로 아는건 오직 그 당사자들뿐일것이다.
가장 불가사의한 내면의 친구. 뭐라고 이름이 붙을 만한 관련도 못되면서 항시 한 몸처럼 서로른 느끼는 보다 근원적인 길벗도 있지 않겠는가.
참 이상하다.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이 언제나 훕족히 채워 지기만 한다 하등의 약속이 없었으면서 어느 한 가지도 제한 하지도 않는, 전적인 허락을 알도록 만든다.

만나지 못하나 부자유 없이 뜻을 통하고 의식과 무의식중에 매양 함께 있다. 두사람의 삶이 마치도 하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듯 이 동일의 질서로서 다스려 지고 순한 습관처럼 어느덧 평화스런 안주가 머무른다.
그러나 이런 일은 설명으로 나타낼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 진정한 길벗에 대해 알아차림은 바로 그의 영혼이 도맡아 하는 더없이 신령한 촉각의 일이기 때문에.
가을이라고 해서 갑자기 여름과 판이해 지는건 아니지 않은가.
여름을 살던 감정의 침전물이 남아, 예서 가을 햇살을 쬐는 것이라고 하겠기에.

자칫 거북한 숙취같이 가을의 감정이 설익은 채, 가슴속에 엉기려 한다
나는 본래가 침울한 성격이고 갈수록 내 감정은 더욱 밑바닥으로 가라 앉는다.
그러면서 항시 자지 않는 파도, 이 모순된 전체의 불합리를 잡아 당기는 저심의 추.
하면, 이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앞날을 맞게 되나?
내 정신의 구심, 그 지표의 끝엔 무슨 계시가 나붙었나?
그렇지, 이리 따지는 논조부터가 상명한 게 못 되리라.

내 동굴은 습하다. 미끈거리는 이끼와 지하수 같은 어둑한 점성 외엔 그 땅에 대해 나 자신 별반 아는 바도 없다. 그러면 저 부단한 무언가를 느끼고 곱씹게만 되어 그게 병이라 하겠거니, 쉬지 않는 감관은 그 자체가 벌써 한낱 형벌일것도 같다. 노상 소모를 보탤뿐인 것을 그러나, 마멸의 이치라아먄 들어 맞는 이 토질 속에서 세차게 치밀어 솟아 나는 신선한 새 순들이 있다.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축복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에 연연한 꿈을 쏟아 부으며 충실히 꽃파우고자 애쓰리라.

내 안에서 자라는 사람, 그는 생명속의 생명이여서 내 몸 전부가 그의 집이 된다.
비록 그에겐 부족하다 해도 나로선 이것이 전부이다. 주고 있는것이 기쁘다는 이 기이한 자족은 내 마음을 환히 눈부시게 한다. 우끼는 일이 아닌고 무엇이겠는가.
하긴, 신망에 인색할 까닭이란 결코 없지....

줄어 드는 시간속에 이 일을 외면하면 사람이 누릴 복락으로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내 안에서 자라는 이 여린 푸성귀, 그 사람을 먹이려는 이 소박한 식단, 진실로 말하거니 이름도 없이, 시간도 없이, 내 안에 머무는 다시 없는 사람아.

가을은 여정을 일깨운다
마른 피리에서 촉촉히 젖은 가을의 노래가 뽑혀 나온다.
끝없이 가고 싶다. 내 눈에 보이는 이 작은 바다가 아닌 큰 바다를 건너는 아름다운 객선에 몸을 담고 싶다. 지금은 떠남을 바라게 되고 다음엔 돌아 올것을또 염원 하리라.

하긴 살아 가는 그 자체가 여행 아니던가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멈추지 않는 여행이다
여로는 무궁하다. 그러나 이때의 무량감은 결국 터무니 없는 착각임을 알게 된다. 정말 지랄 같다.
우선 사람의 삶이란 결코 영원한게 못됨을 오래잖아 알게 되겠거니 종말이 보이는 여로를 그 때문에 더 아끼며 음미한다. 흔히 금싸라기에 견주어 말하는 사람의 시간, 그러나 금싸라기 보다 더 값지다. 살면서 일깨워 지는 갖가지 교훈, 회오, 묵성,어느것이나 다 무겁고 귀하건만 이중의 으뜸은 매번 사람인 것을
사람의 어여쁨, 그 측은함과 뼈마디마다 저려 오는 아픔
그래 참말로 빌어먹을 통증이다 이 아픔 때문에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가슴을 움켜 잡을 때가 있다. 불시에 치미는 핏덩이를 토해 낼 사태를 빚어도 낸다.
그리고 제일로 신비한건 사람으로 생겨난 상처에 낭만한 장미가 피는 일이다.
사람의 유혈에 장미가 피어난다. 그대와 나의 상흔에도 눈부신 꽃봉우리가 솟아 난다 그럼 피밭에 핀 장미의 시를 쓰랴?
번뇌의 가시마다 촘촘히 선혈의 이슬이 맺히는 사람의 꽃나무 죄의 내음이 증발하고, 죄의 풋과일이 하나 둘 매달렸다 떨어지는 사람의 수목
그렇다.
지금은 시름시름 잠들려고 하는 죄의 곤혹, 오히려 죄를 부러워하고 탐내기까지 했던 그 엄청난 격정의 모든 전반은 어떻게나 되었나?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그건 아무런 얘기도 남겨주질 않았으므로 .......

시간은 흐른다.
만조되어 기슭에 돌아 오는 물처럼 세월의 백사장을 쓸며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다.
해일에 앞서 좔좔 밀려 오는 음악의 범람, 멜로디의 물결을 타고 내 앞에 당도 하는한 척의 배, 뱃머리에 서 있는 내 친구. 아주 먼 데서 와, 언제까지나 손 닫지 않는 이역의 섬인 그대, 하나 기쁘게 나는 손을내어 준다
몇번이라도 새로운 감동에 넘쳐 가을과 음악앞에 눈시울 적시우는 그대에게 이 손을 내어 준다.

그리고 이 날, 이 심정을 오래 새겨 영 잊지 않을 것이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