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치면 땅이란 얼마나 깊은 곳인가.
이 깊으디 깊은 데까지 모든 빛들은 줄을 지어 내려온다. 하루의 햇빛 다 따르고 나면 뒤를 이어 달빛 별빛이 또 쏫아져 오는 것을. 밀집하여 숲을 이루는 빛, 빛, 이로 하여 땅위엔 자욱히 빛들의 안개가 서리는 것임을.
어느날은 성총의 환한 너울자락 같은 눈이 나린다.
수평으로 손을 펴들고 정결한 환희를 두 손 가득히 바다본다.체온에 녹에 서서히 물로 풀리는, 차갑고 유리처럼 투명한 것이여. 그리고도 자꾸자꾸 더 내려오는 석고의 꽃잎, 가벼웁디 가벼운 깃털 같은 것이여.
꿈속이 아니면 이럴 수가 차마 없을 꿈 같은 광경들이 우리의 삶을 헐거운 결박으로 느슨히 보듬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답하는 어떠한 일상을 살 것인가.
"그대의 목마름을 안다. 그렇다고 아무 잔에서나 마실수야 있겠는가. 그 목마름을 고치기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곳 그대의 갈증을 스스로 존중함이다" 이 말을 이 겨울에 묵상할 것이다.
"목마름이란 손발을 잘라낸 물" 이라고도 말하는 규스타브 티본에 의하면 "멀리 가려는 사람은 말을 조련해야하는 데 이때 배불리 먹이려는 궁리보다도 공복을 견디는 내핍을 길러야 할 것" 이라고 경고 하고 있다.
이 말들은 귀한 교훈들이지 싶다.
멀리 가려는 자여, 그대는 먼저 그대 자신의 공복을 이길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이다. 먼 길을 가는 말로 말하더라도 그건 우리 자신일밖에 없다.
[목마름을 소중히.]
이건 유익한 권유이다. 다만 터득과 실천이 결코 쉽지가 않다.
사람에겐 상승과 낙하의 충동이 반반으로 있는것 같다. 솟아오로고 싶은 그만큼을 떠러져 내리고도 싶다. 갈증이란 조급한 욕구이다. 이 일이 곧 떨어져 내리는 성질이라 하더라도 떨어지는 유인을 쉽사리 물리치기란 어렵다. 그러나 아무런 가치도 따라주진 않으며 삶을 한낱 물거품에 내던질 뿐임을 익히 안다.
상승성질은 이와 반대다.
오르는 일의 어려움, 아무리 준령에 익숙한 등산가라도 산이란 매번 새로운 위포겠거니 오직 한 오리의 로프에 유일의 생명을 걸고 첫발을 내딛는 일의 그 전률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를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정상의 감격, 거대한 수정판 같은 창공, 고산식물들의 골짜기를 쓸어 온 바라들조차 유수이 정을 담아 선약인듯 건내어 주리. 하면 아무리 올라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아니, 쉬임없이 걷는 일조차 나에겐 너무나의 어려움이더라도 공복을 견디며 먼 길을 줄곧 가야만 한다.
내 아파트 위의 겨울산은 깊숙히 내려 앉았다. 나무들은 나직이 인동의 노래들을 부른다. 견디는 생명들 중에서 나목이야 말로 의미의 전형이다.
땅속엔 굳건한 뿌리를 실히 박고 줄기는 한공에 떠서 목각후조의 한무리처럼 바람을 가른다.
겨울의 사유는 앙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풍요이다.
나무들은 쇠붙이처럼 단단한 수피 속에 우유보다 향기로운 수액의 범람을 지니고 있다. 그건 순백의 혈액이 아니고 무엇이랴.
"행복에서도 구원 받아야 한다"고.
이는 누구의 말이였나. 겨울엔 잃었던 말들을 찾아내고 이에 불을 당겨 붙인다. 불살의 꽃잎들이 아름답게 피어 이운다.
행복해서도 구원 받아야 한다고?
언뜻 고지듣기지가 않는 이 말. 그러나 음미하면 어렵잖이 해득이 된다.
가령에 행복의 개념을 도달이나 충족쭘으로 잡고 있다면 필연코 이와 같은 얘기가 되어져 나올밖에 없다.
무릇 생명에겐 끊임없는 신진대사와 신선한 탄력이 함께 해야한다.항시 충일해야 할 생명의 긴장도, 선흥의 피의 순환, 내달리고 뛰어오를 줄을 알아야 한다. 격렬한 아품과 건강한 저항, 땀과 눈물과 유혈, 미칠듯 달려가는 추구와 의용, 이런것이 손잡고 있지 않는 삶은 결코 생동하는 인생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인간적이며 전인적인 진실의 모든 발성, 찾아서 만나는 겸혀한 인간관계, 이런것이 정지된 곳이라면 사람이 무슨 맛으로 발붙일 수 있으랴.
자아의 긴 터널을 지나가는 존재의 근력, 투지와 분발이 샘솟는 곳, 그렇다. 인간이 원하는 행복은 인간적 성숙과 풍요에로 나아가는 점진적 도정이 아니면 안된다.
행복은 반드시 가치를 수반해야 한다. 행복이란 곧 가치의 확대라야 한다.
현재는 신산의 쓴 맛이더라도 그 방향은 빛을 향해서 가는 확실한 약속이여야 한다. 정신의 열량이 1빛을 향해서 가는 인간 반열만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인간적 행복의 여건일 것이다.
알을 깨고 아노는 천하의 새들, 진실로 스스로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고서는 결코 새가 되어 날울 수가 없었다.
이제 깊은 겨울로 들어 가고 있다. 겨울의 노래를 나직히 불러 보자.
겨울은 사랑의 계절이기도 한다."그 겨울은 눈시린 소금밭의 짠 맛보다도 더 매운 모랫바람" 이 수없이 가슴 맞대이는 춥고 외로운 사랑이다. 겨울엔 사랑하지 않울 수가 없다. 식혀도 식혀도 더시 더워 오는 가슴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지 못할 그 계절인 것을 떠나간 사람조차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면 단 샘물 펑펑 쏟는 그 기쁨을 대접해야 한다. 서러웠던 한철의 얼룩을 씻어내고 새로이 태어난 두 사람처럼 천진과 단순만의 더운 손을 맞잡아야 한다.
"사랑은 한 가지의 말을 가질 뿐이며 그 언어는 오직 기도" 라고 말한 이가 있다.
하지만 다시금 사랑이란 무엇인가고 묻겠다. 그리곤 대답하리라.
사랑이란 으뜸으로 축복된 만남, 그와의 만남 때문에 신생과 풍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고. 그와의 만남은 바로 그녀 자신의 깊고 깊은 내면을 만나는 일, 이처럼도 믿을 수 없는 놀라움과 감격은 어디에서 파도치며 온곳일까.
"사랑은 강물처럼 부푸는 내적 충일과 땅밑을 파는 노력" 이라고 했다. 진실로 그럴테지. 그 나머지의 애환들은 사랑에 따라오는 한낱 지류에 불과할 것을.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사랑은 동일한 가치를 섬기는 일이여야 하며 다른 말로 유일한 신에게 공동의 신앙을 바침이다. 격의 없는 신뢰와 일치되는 소망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사랑의 보장일 것이리라. 사랑 안에서 나누어 가진 것, 더러는 기억에서조차 놓쳤더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마주 했던 일은 능히 영혼의 밑바닥에까지 닿아 내렸으리라. 결코 지워질수가 없도록 영혼의 살갗에 새긴 글씨들
이런것이 사랑의 비의 임을 겨울밤에 절절히 수궁하게 된다.
겨울 산야에 울리는 종소리
계절은 한창 좋은 술처럼 익어가고 있다.
자주 눈이 내리는 곳은 아니지만 눈과 음악과 불더미들의 축제. 저만치 아득한 지평선이 오고 있다.
점차로 가까와지는 새해의 발걸음.
아아 새해여,
이 안에 지금 두 손으로 바치는 건 성숙의 염원이 성취에 이르도록 비는 그 일이다.
이해하고 축복하고 사랑하는 일. 무안한 감동과 무한한 예술심. 신망, 그리고 감사.
삶의 아름다움이여, 슬픔보다도 더 슬픈 삶의 장함이여.
'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 글씨의 낙서2 (0) | 2011.02.02 |
---|---|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 (0) | 2011.01.28 |
이런 기도는 어떨까. (배경음악:I Muvrini - E Dumane Dinu..외3곡) (0) | 2010.11.28 |
남자의 생각과 여자의 생각.(배경음악 \Niamh Parsons - Black Is The Color외5곡 (0) | 2010.10.08 |
설익은 관념의 숙취 (Anouar Brahem Trio 외1곡) (0) | 2010.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