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6

ivre 2011. 12. 12. 18:57







태초의 할매여,
슬픔이 투명 하려면, 종소리 맑디 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몇천만번을 더 사람도 울고 종도 소리 질려야 하는 겁니까.
내가 배운 말중에 넘치는건 수식어요, 모자라는건 확신한 결단의 어휘뿐이였던 것입니까.
고백하건데 이제것 내 머리속의 글들은 지나친 형용사 따위로 가면을 쓰고, 드넓은 바다를 손톱만한 돛 하나 달고 항해 하는
꼴 이였습니다.

이전에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바의 사상의 크기보다 좀더 상황을 부풀려 나타내는 해픈 말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론 또 반대로 제 사념을 다 드러내기에 말의 상식이 엄청나게 달린다고 절감하곤 했습니다.
하면, 어느쪽이 얼마만큼의나 더 어설푼 것이겠습니까.
사실로 말해 남들이 제게 대해 아는 것보다 실지의 저는 더우기나 어리석습니다.
나태하고, 축축하고, 속마음에서 매사에 불손합니다. 제 감정은 미망에 잘 엎어지며 공리를 탐내며 어지러운 욕정에 집착하여 수심의 발열을 자주 합니다.

태초의 할매여,
이 시각에 유서를 쓰는 이는 피부를 씻어가는 그 공기조차 한결 절실하고 청량한것이 되어 있겠습니다.
구구절절히 유서를 쓰듯 또 유언을 말하듯 숙연한 자율, 잘생긴 질서의 향연에 제 좌석이 있는 것이라면 자의식이 와해의 이 엄청난 물락감을 타개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사 지바고>에 나오는 바이카로스 호수를 실지로 돌아 보는 노장군의 얘기로는 영화60도의 처절한 냉기가 깊은 저류에서 부터 물을 얼려 송곳 같은 경도로 곤두세우면 몇갈래로 중심이 쪼개지는 역작용으로 해서, 천지개벽의 굉음을 내며 거대한 빙판이 되어 깨어 진다고 했습니다.
최애의 여인을 남의 나라에 망명케 하고 그 자신은 적화마수의 질편한 피바다인 슬픈 조국에서, 그래도 그곳만이 제나라의 영토여서 거기 남고 거기서 죽으려는 다짐을 굳히며 유리창에 낀 수정 꽃무늬의 얼음을 긁어 단심과 비창의 시를 쪼아내던 소설 속의 지바고를 기억에 떠올립니다.
진실로 큰 농도, 그건 압도적인 미의식을 부채질합니디.

하옵고 태초의 할매여,
지금 나의 하늘은 쏟아지는 가을 채염(蔡琰)으로 적시어 있습니다.
때때로 두껍게 구름이 끼어 하늘이 온통 잿빛일 적도 있으나 구름이 또 비끼면 청명한 천지,만산의 홍엽이 포도주처럼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주황은 태양의 색깔, 순금의 색깔, 오곡과 백과가 온통 주황 아니면 선홍으로 농익어 파열 하는 이즈음에 그러나 자주 사람의 추위에 몸을 떨게 합니다.

태초의 할매여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당신께서 배고프거나 추위를 타는 일은 미상불 사람 때문이며 한갓 사람을 위해서만 그리 되어지리라고 말입니다.
하오나 사람은 태초의 할배와 할미에게 굶주리거나 추워 하진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초의 할배와 할미와 대좌를 감당할 수 없고 단순히 우리들 인간끼리 사람 때문에 추워 하며 허기져 드러눕게 됩니다.
작은 그릇에 많이 담지 못하는 이치로 해서 사람은 제 그릇의 크기에 따라야 하고, 매번 저희들끼리 스치고 비비며 담고 덜어내는 되풀이에 급급합니다. (휴... 그런데 손이 너무 시렵다. 오늘도 날씨가 무척이나 추운가 보다)

사람은 저마다 고독하다고 울부짖지마는 실은 고독해서조차 전인적인 대좌로 이를 응대하지 못합니다. 자부가 모자라고 겁이 앞서서, 인격이 어리고 채산이 얕아서, 다가서는 고독을 한 번인들 선뜻 결단해 품어 주질 못했습니다.
고독을 향해 닫아 붙인 문의 이켠, 그러나 이때 정작으로 크게 남겨진 문제는, 그것을 내 문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람은 아직도 고독했다는 부조리였습니다.

공허는 아무데나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 손으로 빚고 세상 안 어디에나 꽂아 둡니다. 아마(亞麻)같이 잘 자라서 이내 실로 풀리면 스스로 인간들 몸에 휘감깁니다.
공허는 바람결에 섞여 봅니다.
그 안에 놓아 기르는 야성의 어린 짐승이 앞서 말한 고독, 이게 자라면 억세고 사나와져서 사람의 살을 깨뭅니다. 항시 수용을 거부 했지만 내면의 번식으로 쉽사리 포화를 불러오는 고독.
그 밖에도 전후가 햇갈리는 인간의 여러 속성.
걷잡을 수 없이 엄습하는 유실감이 한낱 검부러기처럼 나의 전 생활을 흡수해 가려는 이 가파른 위기. 정백한 채념의 고개 넘어 크고 작은 바람이 또 불어 오고 눈 어지러운 화문의 입술자국을 함부로 눌러 칠합니다.
무위의 감각에 흘리는 뭔가 나른한 도취.
물론 이래선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잡니다. (잠들기 전 담배를 입에 물고 한모금의 니코틴을 페에 박아야 잠드는 이도 있지만)
모든이가 잠들고 나면 아침엔 깨어 나는 이와, 잠깨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날 사람은 죽습니다.
누구나 다 이 이치를 당하건만 어떤이는 정녕 죽고, 다른 이는 참으로 죽지 않습니다.

태초의 할매여,
이 사내에게 다른 시야가 열리기 해 주십시요.
제 관념은 매번 엇비슷하여 글로나 말오서도 다분히 퇴색되었으리라고 잘 압니다. 제 속에서 새로운 것이란 별반 못 자라고 한 성질의 상처에 연유하는 통증이 거푸 몇 번이라도 새로와 지는 기묘한 자각증만이 제일로 뚜렸합니다.
관용의 나무는 가꾸지 못하고 옹색한 씨앗에만 물을 많이 주었습니다.
어렸을적의 저는 명성을 몹시 부러워 했습니다. 설익은 분발심을 키위준 최초의 요람은, 그 이름을 하찮게 허영심 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속으로 사납고 걷으론 병약하던 한 소년의 모순된 소용돌이가 신음처럼 내어질러져 어수선한 잡기에 흐린 자획을 그어 갔습니다. 체력에 얹혀 부산히 젖혀지던 일월, 흐르는 시간. 그러면서 점차로 원하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얻어 지는 것과 결코 얻지 못하는것의 구별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요러 사람을위해 존재하며 여러개의 필연과 맹목의 우연들이 함께 담겨 회전하고, 그 중의 어떤건 순리로 이루어 지나 더러는 역리로 뒤집힘을 보았습니다. 고쳐야 할 일은 바깥에서나 제 안에서도 많이 생겨 났으나 양편이 다 그 성취를 얻기 어려운 데에 공통점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태초의 할매여,
제 안목이 쉬원히 트인다면 좋겠습니다. 관념이 명석해 져야 지표가 투철할 수 있겠습니다.
근간에서 부품까지의 기체를 점검하듯이 목적에서 행위까지의 제 모습을 살피는 충분한 시력을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할미여.
사람의 추위를 당신에게 소리 질러 닿게 하여, 그리하여 받아 주시올지. 아니 그 먼저. 고작 이렇게 말머리를 돌려온 저를 용서하십시요.
사람의 추위를 당신의 잿상에 올리옵고, 그 나머지 아무 말을 아뢰지 않은들 차라리 족할 것만 같습니다.
혼자의 추위와 여럿의 추위
걷으로 드러나는 추위와 가려진 속살의 추위.
태초이 할미여,
당신게 구걸치 않으오면 어째도 영 얻지 못할 구원의 단비.
사람의 추위에 주린 연민의 해그림자를 드리워 주십시요.

(니미럴, 말은 이리 하면서도 오라지게 춥네."이건 무슨 넌센스지?" 커피라도 마셔봐야지).

태초의 할매여,
추위의 다른 이름은 이반(離反)입니다.
버리고 버리우는 일입니다.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는 문, 가다려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 입니다.
성취를 단념 했지만 아직도 내심에선 얻고자 하는 그 마음 입니다.
자기의 한 일이 보잘것 없다고 깨닫는 심정, 고쳐서 새로 행하기엔 이미 시간이 모자람을 아는 일입니다.
심야에 잠깨어 이명을 듣는일.
이젠 지긋지긋 하여 영영 깨지 않길 바라며 잠드는 날이 많아 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야 남겨진 진실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부부가 헤어지기 위에 재판소에 가는 일, 또는 참 사무치면서 음악을 듣는 일입니다.
자식의 관머리에서 선지피빛 석영을 망연히 바라보는 그 일 이기도 합니다.
이미 말을 안 하는 일.
심지어 기도 중에 머리를 가로젖는 일입니다.

태초의 할미여,
이제껏의 짐념에서 얼마간 손을 떼고 그러나 새로운 계획을 맞는 일도 없이, 울지도 않고 잊혀진 작은 섬 같은 저 자신을 견디겠습니다. 막 머리를 감고 아무렇게나 걸처 입은 이 사내는 새벽녁까지 않아 있습니다. 몇일 몇밤을 연거푸 이렇게만 있습니다.
사실은 아주 절망도 아닙니다.
어져면 추위를 좋아 하게 되고 정들이게 되면서 추위의 꽃심지를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불을 일구는 데 쓰는 꼭 하나의 부싯돌처럼 이 또한 천하의 비장품으로 치고 제 삶의 온갖 꼬투리에마다 다시 없는 비약으로 이 추위를 발라 간절히 어루만제게 될는지도........
마음의 말을 묵서로 써서 다시 소지로 사르면, 비록 저승의 사람이라도 이를 굽어 읽는다고 풀이한 그 어이없는 구습은 대체 뭡니까.
얼마쯤 감상에 곁들였긴 하되 어차피 추위의 근본은 매우 날이 선 인간사의 기조요, 이를테면 대지의 지축과도 같이 삶의 중심에 관련하는 일일 겝니다.

태초의 할미여,
저는 한갖 어둑한 여울을 타고 한없이 흘러 내려집니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어느깊이에 다다르게 되올른지.
거긴 무엇이 기다려 주고 있는지.
정녕코 저는 아무일도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따뜻한 가슴 하나 찾아 가는 일만이 제겐 전부 입니다.
지금 이 좌석에서 시간을 묵히며, 낡은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갈수록 크게 울리는 네모진 방안에 오래도록 이렇게 있겠습니다.
제가 거느리는 추위를 포장처럼 둘러치고, 이미 추위 때문에 놀라는 일도 없이 지금껏 내려온 제 삶의 후미진 길을 고요히 한 발씩 한 발씩 더 밝고 갈 뿐입니다.
오직 저 혼자서.
태초의 할미여 ,오직 저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