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노래5

ivre 2011. 8. 27. 02:36




나를 유혹 하지 말거라. 너는 너대로 뽐을 내고, 나는 나대로 뽐을 내자꾸나. 고맙다 거기 있어 줘서.

 

어제의 글을 다시 이어 써 본다.

독버섯으로 불그러져 솟아나는 고독도
아침저녁 물 주는
화초로 알자커니
........ (생략)

이 시 역시도 토막 토막만 기억 난다. 누구의 글인지도, 제목이 뭔지도 그리고 무엇 보다도 지금 이 대목에서는 제목따위는 중요 하지 않다. 저 심정을 헤아려 보자는 것이다.

차라리 고독도 나무처럼 키워 보자는 꿈을 보듬는다.
쾌적한 풍토로 가려서 심어 주고, 구김살 없는 하늘을 향하여 실컷 손을 뻣게 해 준다면 어떨까.

필경은 고독도 하나의 은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갈구 하며 접근하는 일도 고독의 소치요, 나아가 인간이 신께 바치는 뜨거운 갈원의 부르짖음도 실은 고독의 목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독이 사람을 떠났을 때 사람은 신을 망각하고 그 이웃을 저벼렸었다. 다시 고독이 문을 두드리고 찾아오면 눈물에 젖어 경건히 인간 본연의 온정에 눈을 뜨지 않더냐.

조금 멋지게 낙엽을 표현 해 보자.
낙엽에 깃들인 은혜.
고독속에 불싸처럼 숨겨진 은혜.
이러한 것들을 찾으며 정들이며 살아 가고 싶은데, 나와 닮았다고 생각 했던 인간들은 하나 둘 계산서를 뽑으며 저마다의 안식처를 찾는다. 그 장소가 어디던 목적만 달성 하면 그만인 것처럼.

인생은 차가운 석기 모양 만지면 만질수록 손이 시린 그러한 느낌의 시간인들 얼마나 많은가.
인생은 애당초 그림자도 없이 태어난 것 모양으로 많은 사람 속에 찾으면 찾을 수록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그러한 설움인들 얼마나 잦던가.

그러나 인간이라는 그릇을 채워 가는 질량에 있어 이러한 감정은 그리 나쁜 축이라고 할 수 없다.
입맛엔 쓴 선약의 경우처럼 고독도 인간을 키우는 설량한 약효를 가졌다곤들 아니할 수 없다. 이를테면 슬픔에도 품격을 따질 수 있듯이 고독에 있어서도 품격을 유지 해야 한다.
격조 있는 슬픔.
격조 있는 고독.

이러한 나무를 잘 가꾸는 이가 있다고 하면 그는 인생이 부유자요 결코 인생의 빈 자일 수는 없으리라.
부유자를 자처 하고 싶은 그런 선망은 없지만, 나의 마음 속에 가시덩굴처럼 아픔을 솟아나게 하는 고뇌의 식물을 어떻게 가꿔 갈 것인가의 그 지혜는 꼭 얻고 싶다.

고독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상처이고 보면, 오히려 그 상처를 다스려서 인간이 영광된 기장으로 바꿔 놓는 방법을 여러 사람이 힘 모라 모색해 본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 된다.

곷을 피움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잎을 떨어뜨림은 참으로 황금처럼 다져진 열매를 존절히 지킴에 여념없이 하려는데 있다고 할 양이면, 여기서 얻는 바 값진 교훈이 인간에게 얼마나의 보탬을 주는가를 생각해 보자.
낙엽의 교훈.
낙엽의 사변.
만만찮게 멋진 과제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소주잔엔 술이 남지 않았다.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격조 있는 슬픔과.
격조 있는 고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