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시간에 대한 우의 적인 단상.. 박이도

ivre 2009. 1. 11. 07:56
새해를 맞는 마음이 조금 착잡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되씹기도 전에 부음 한 장이 전해졌다. 한 인간에 관한 마지막 전갈이다.

새해를 맞는 것은, 기쁨보다 무엇인가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의 표정처럼 나 스스로가 애처롭게 보인다.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허무 때문이 아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잡다한 상념 때문이다.

새해를 맞는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우리는 기쁨이나 희망의 미래 지향적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인생의 덧없음이나 좌절의 감정에 빠질 수도 있다.

새로운 꿈이나 이상을 설계할 때 새해는 손꼽아 기다리던 열려진 시간이 된다. 그러나 새해라는 하나의 마디를 풀어 버리고 잴 수 없는 과거에서부터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미래까지의 시간 선상에 하나의 흑점으로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의식할 때, 그것도 어느 시기까지만의 유한한 존재임을 의식할 때, 새해를 맞거나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하고 무서운 사실의 확인인가.

나는 오늘 아침, 어떤 입장에서 새해를 맞이했던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으로서의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접어 두고, 나는 진실로 오늘 삶의 무의미함을 절실히 절실히 생각하게 된다.

결코 한 동료 교수의 부음을 접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괴로운 자각에 속하기 때문이다.

새해에 새출발을 꿈꾼다는 것은 우선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감을 줄 수 있다. '출발한다'는 사실은 구체적인 하나의 행위인 동시에 시간 개념으로 볼 땐, 그 역시 하나의 추상성을 면할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소위 '문화'의 개념에서 지적되듯이 '출발한다'는 의미를 시간 개념으로 파악해 보자. 그것은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을 모두 지닌다. 우리가 시간을 주관적 입장에서 바라본다고 할 때, 이미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방향 감각이 설정된 상황 속에서만 가능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L.A.화이트는 신체의 내적인 문제들 - 개념·신앙·감정·태도 등 -을 인간 유기체로 보고, 이것과 상반되는 외적인 맥락에서 어떤 상징된 사물이나 사건들과의 체계적인 관계라고 규정 짓고 있다.

여기서 내적인 것을 주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외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위치와 처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철새들이 찾아오는 큰 강줄기의 하구에 서보면 뿌옇게 흐르는 시간의 이동을 상징적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 세월의 흐름이 저 철새들이 내리고 뜨는 모습에서, 그들의 한가로운 날갯짓이며 간간이 질러대는 소리들이 퍼져 나가는 황량한 들의 풍경이 한 줄기 시간의 선상에 놓여 있는 것처럼 의식된다.

어디서부터 날기 시작했을까. 한 무리의 겨울 기러기 떼가 차분히 내려앉는다. 언제 어디로 떠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 스스로도 모른다. 오직 시간이 흐름 속에서 계시처럼 그들의 출발을 지시하는 제3의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철새들의 도착은 의미상 이미 또 한 번의 출발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새해를 맞는다거나 새출발을 한다는 것은 의미상,시간의 선상에서 이미 목적지인 '귀결'의 상황을 맞고 있음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유한한 생명체므로 모든 상대와의 이별을 전제한 만남이 되는 결과론과 같은 이치다.

어쨌든 오늘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떠난다. 시간을 좆아가는 것인지, 반대로 떨어져 나가는 것인지 어던 표현을 해야 할지 불확실하지만, 그냥 새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사실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시간을 직선상에 놓고 그 어느 위치까지 발전되어 나아가는 개념이 아니라, 신화의 개념처럼 주기적으로 순환되는 하나의 반복되는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이상적일 것이다.

어제 떠오른 해가 오늘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나 실은 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듯, 시간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앞에서 정지하고 있는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간 관계에서 볼 때 한 상대를 만난다는 것, 그것은 언젠가 헤어진다는 냉엄한 전정에 불과하다. 만남이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이 곧 만남의 공식이 되는 것이다. 애초의 시작이랄 수 있는 시간의 기점, 그것은 시간으로서보다는 공간의 창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코스모스의 세계가 열리는 질서와 조화, 합리적인 발전이 열리는 공간이 창조인 것이다. 그래서 출발의 참뜻에는 순환의 완결이며, 관념의 실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의 출발은 곧 도달함을 뜻한다. 도달함은 하나의 만남이 되고 만남은 희망의 세계요, 가느으이 세계다.

차례는 우리 풍속 중에 엄격한 의식을 수반하는 것 중 하나다. 정월 초하루에 거행되는 의식이다. 이것은 이른 새벽 아침 식사를 들기 전에 새옷으로 갈아입고 부모에게 세배를 드리는 의식이다. 그리고 식사를 들고 가족과 이웃 간의 세배가 이루어진다.

이 정초의 차례를 통해 새해, 새출발의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며, 이 의식은 결코 '첫 번째 행사'가 아니라 시@?시원이 언제인지 모르듯 한없이 반복되었고, 또 반복될 하나의 '문화'로서의 사건이다. 시간은 끈이 없어도 우리의 출발은 끝이 있고, 또 그 끝이 보인다. 우리는 그 끝에서 항상 또 한 번의 출발을 반복한다.

나는 우화의 양식을 좋아한다.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모든 요소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대한 인식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우화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을 쓰는 것 같다. 즉 그는 "미적 가치나 윤리적 가치, 그리고 종교적 가치는 일상 언어에 의해 표현될 수 엇다"고 말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우리의 내재적인 행위인 꿈(특히 소원 성취 지향의)도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시간 ―

이것도 아름다움, 값어치, 혹은 성스러움 따위와 동질의 것일 수 있을까. 시간이 독자적으로 가치를 지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의 의의는 인간에 의해 상대적으로 의식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새로운 출발. 우화적인 비유로 생각할 때 이것은 의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시간 개념으로 보면 출발의 의미는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 즉 "하나의 명제는 실재에 대한 하나의 그림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나는 우화보다 그 우화 속의 구체적인 비유를 더 좋아한다. 우화는 이간 의식의 내적이거나 외적인, 혹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모든 의식에 대한 속박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까지를 포함한다고 생각된다. 고로 시간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이 속박이란 하나의 제도에 해당하는 것. 우리는 인위적인 제도 속에 스스로를 예속시키고 간헐적으로 만족을 느낀다. 시간에 대해 새롭다거나 처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가치나 의의를 자의적으로 부여한다.

매일 솟는 해를 오늘 아침엔 새해라고 의식하는 우화를 즐긴다.

우화 속에 나오는 인물 중에 나를 닮은 인간형을 발견하는 것은 신비에 속한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 아니 반복적인 발견이 되는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연속적으로 '새출발'하는 순환적인 사고 방식 - 이것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 중의 하나일 것이다. 꿈과 환상,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인간에게 불을 갖다 준 자는 누구인가? 프로메테우스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불을 거두어 갈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누구'가 아닌 '시간'일 것이다.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성경에는 내세가 다가왔다고 경고하낟. 여기서 지적하는ㄴ 시간은 우화적이다. 그 시간은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몇 천년의 세월이 될 수도 있다. 또 성경에는 불에 의해 심판받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새출발은 파국으로의 전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