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도 없이 엄습하는 ― 1964. 1. 18.
그러나 끝났다. 왜 끝났는지는 나도 몰라. 아무와도 나는 완전히, 절대로, 또 지속적으로 공감을 나눌 수 없는 모양이다.
결별은 돌연 이유도 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어느 감정인 것 같다.
나 자신으로 파고 들어가고 나를 이룰 계절이 온 셈인가?
소시민적 일요일 ― 1964. 1. 19.
권태와 어느 안정감 ― 소시민성 속에 자기를 고정시키려는 의도와, 또 그 의도의 무용함과 번거로움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텅 빈 공허감이 내 가슴을 찬 바람 불 듯 지나간다.
감정도 애증도 다 멀어진 느낌. 가정, 직장, 나, 국가, 사회...... 이런 단어들이 아무 연결도 없이 내 머리를 지나갔다.
시간의 풍화 작용― 1964. 1. 19.
결별은 쉬운 일. 그러나 그 다음이 항상 문제인 것이다. 사고는 항상 사실적인 힘임을 믿고 있다. 끊겠다는 의지가 끊는 행위와 같은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 미소나 한 눈동자, 한 목소리를 기억의 표면에서 말살해 버리는 것은...... 많은 극기와 시간의 풍화 작용의 도움이 필요하다. 잊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관념이 긍정한 행위를 우리의 감정이 받아들이기에는 또 하나의 훈련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한 '자유 의지'는 아닌 것 같다.
연기의 불일치 ― 1964. 1. 21.
그렇다. 나는 나와 연기를 일치시킬 수 없는 순간을 종종 갖는다. 그럴 때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를 혐오해서라기보다 혼자 있는 것이 필요해서인 것이다.
달팽이의 논리 ― 1964. 2. 12.
네가 나의 상황(예컨대 나이) 같은 것 때문에 나를 불신하느냐? 그와 똑같은 이유로 내가 너를 불신한다면? 그것은 원을 긋고 도는 달팽이의 논리가 될 것이니 그만두자.
달병(Mondkrankheit) ― 1964. 2. 26.
오늘 내가 종일 이상스럽고 괴로웠던 이유를 지금에야 알았다.
마당에 나가보니. 열 나흘 달이 차 있었다. 고교하다. 만월에 네게 오는 달병.
숲의 고독(Walt-einsankeit) ― 1964. 2. 27.
사람으로부터 고독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온갖 직업은 가질 만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불로의 고독이라도 그걸 지키고 싶다. 그것만이 자기 모독에서 자기를 가장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애정의 구두쇠 ― 1964. 3. 2.
그는 애정을 받아 본 것은 여덟 살 때 이후엔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애정의 구두쇠가 됐는지 모른다.
방법― 1964. 4. 1.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든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만큼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여자 ― 1964. 4. 1.
여자는 체계화된 생, 또는 이성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재능 ― 1964. 4. 1.
재능을 일상 회화 속에다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 1964. 4. 1.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규제된 광기 ― 1964. 4. 1.
규제(control)된 광기. 가정, 직업. 진정한 자기 규제
싸움 ― 1964. 4. 22.
그의 에고이즘(自己主義)과 나의 그것, 그의 독점욕과 나의 그것, 그의 자유로우려는 성격과 나의 그것, 그의 이성적인 면과 나의 그것이 항상 부딪쳐 만나면 싸움이다.
그가 너무나 나와 똑같아서 싸우게 된다.
나와 너무나 달라서 싸우는 경우도 있는데, 약간 희극적이다.
성과 화폐 ― 1964. 5. 9.
성이란, 화폐처럼 중성적일지 모른다. 거기에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인습 같다.
탄생 ― 1964. 5. 11.
나는 아직 잠자고 있나? 태어나고 있지 않나?
언어와 한계 ― 1964. 5. 13.
매순간마다 확인시키고 싶다.
도대체 내구성이 없는 언어로가 아니라 언어 따위는 초월한 무엇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1964. 6. 16.
......그리고 헌책방 돌기, 봉투 만들기, 맛있는 것 먹기.
순서의 혼동 ― 1964. 6. 20.
가장 큰 고통은 서로 어긋남을 갖는 것이다. 순서가 일치하지 않고 혼동된다.
말 ― 1964. 7. 4
말은 일단 발언하면, 그 말이 사람을 지배하고(나쁘게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만) 또 이끌고 간다.
죽었니?― 1964. 7. 23.
언젠가 그에게서 왔던 참 즐거웠던 편지 하나가 기억났다. 그것은 단지 흰 종이 위에 '죽었니?'라고 써 있었다.
추상적인 인물로서 ― 1964. 8. 8.
가끔 그가 나에게 구체적인 인물로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으로 엄습할 때가 있다.
아픔, 슬픔, 그리움 등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그때마다 느낀다. 어떤 신화적인, 또는 유년 시절의 죽어 버린 친구의 망령 같은.
구조적 갈망 ― 1964. 8. 8.
어떤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지어진 갈망을 느낀다.
가을과 정리의 때 ― 1964. 9. 7.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뼈 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때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떼어 버려야겠다.
미래 완료의 시간 속에서 ― 1964. 9. 19.
미래 완료의 시간 속에 산다.
일루전(Illusion). 모든 것은 환상.
미래까지도 이미 완료된 시칭 속에서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정의할 수 없는 것 ― 1964. 10. 5.
왜 보들레르는 일생 동안 쟌느 듀발(Jeanne Duval)을 사랑한 것일까? 백인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욕의 생활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마음까지 극악했다는.
또 릴케는 왜 자기보다 열 네 살이나 위인 남편 있는, 남성적인 루우(Lou)를 사랑했던가? 니체가 '수세기에 한번 구라파에 나타나는 두뇌를 가진 여자'라고 평한 루우의 총명 때문에? 릴케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국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정의할 수 없는 정의보다는 보다 높은 법칙 밑에 놓여 있어, 운명이니, '만남'이니 라는 말로 그 편린(片麟)을 알 수 있는자 이외에는 전모를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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