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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깊이 / 김사인 / Alexi Murdoch - Song for you

Alexi Murdoch - Song for you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 년이나 이 백 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카테고리 없음 2025.04.28

조이미용실/ 김명인 / Gurdjieff, Tsabropoulos- III

늦은 귀가에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입구의 파리바게트 다음으로 조이미용실 불빛이 환하다 주인 홀로 바닥을 쓸거나 손님용 의자에 앉아 졸고 있어서 셔터로 가둬야 할 하루를 서성거리게 만드는 저 미용실은 어떤 손님이 예약했기에 짙은 분 냄새 같은 형광 불빛을 밤늦도록 매달아 놓는가 늙은 사공 혼자서 꾸려나가는 저런 거룻배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이 허술한 내 美의 척도를 어리둥절하게 하지만 몇십 년 단골이더라도 저 집 고객은 용돈이 빠듯한 할머니들이거나 구구하게 소개되는 낯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사는 일 - 나태주 / Tom McRae - Hummingbird Song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이병우- 연인

밤늦게 귀가 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하루 열 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 할 때면 큰 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은 막다른 골목 같다. 옐로우 하우스 빨간 벽돌 건물이 집 앞에 있는 데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가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 진열된 여자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을 배달 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을 타는 아가씨, 붉은 등 유리 방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이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

김재진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김선우 / 얼레지 / Alejandro Filio - Dicen

Alejandro Filio - Dicen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 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 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고독한 낙서 25/3/31/봄 /Krishna Das - Mere Gurudev

우리의 생활 감정이 망명을 입어 그것을 밖으로 불려 나온 그 말들이 어수선하리만큼 퍽이나 다양하다. 가령 서정시를 펼처 놓고 볼 때 다른 말들도 많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다못 번번이 쓰이고 있는 말이 해방까지엔 슬픔 및 그런 계보의 어휘들이였고 보면 우울한 식민치하의 못 심적 상처를 능히 미루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개체의 이탈을 저마다 깨닫게 됨에서 오는 고독의 관념이 범람해 있고 보면 단연 고독이라는 말이 우리의 심정을 토로하는 대표적? 표현이 되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누구나가 고독을 하소연하고 있으며 기실 고독의 의식으로 질식이 될 듯 숨 막혀 보이는 수가 많다 하겠지만 요컨대 우리가 아무리 이와 같은 말을 발견해 내고 속 시원하도록 실컷 써 본다고 해봤자 인간의 내심, 그 갖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