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 감정이 망명을 입어 그것을 밖으로 불려 나온 그 말들이 어수선하리만큼 팍이나 다양하다.
가령 서정시를 펼처 놓고 볼 때 다른 말들도 많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다못 번번이 쓰이고 있는 말이
해방까지엔 슬픔 및 그런 계보의 어휘들이였고 보면 우울한 식민치하의 못 심적 심적 상처를 능히 미루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개체의 이탈을 저마다 깨닫게 됨에서 오는 고독의 관념이 범람해 있고 보면 단연 고독이라는 말이 우리의 심정을 토로하는 대표적? 표현이 되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누가 나가 고독을 하소연하고 있으며 기실 고독의 의식으로 질식이 될 듯 숨 막혀 보이는 수가 많다 하겠지만 요컨대 우리가 아무리 이와 같은 말을 발견해 내고 속 시원하도록 실컷 써 본다고 해봤자 인간의 내심, 그 갖가지 멍울이 이로써 다 풀려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번뇌나 혼란이 이로 인해 수습되거나 위안받는다고도 결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생명의 그 시원은 훨씬 더 깊고 미묘하고 또 개개의 난점을 거기 지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입고 사는 의복가지가 실은 그 밑에 감추인 사람의 신체와 어느만큼 무연해 있는 면이 없지 않듯이 사람의 말로써 마음에 품은 바를 마타맴자 하되 심성의 밑바지 그 유현한 저류는 정작으로 별달리 굽이치고 흘러가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말이 한갖 서글프며 사람이 마음 바치는 정도 기실 덧없고 허무하다고 말해서 좋을 듯싶은 것이, 사실상 인간정신의 진실한 동맥은 오히려 외딴곳에 버려져 있길 잘하고 그 진정한 발언은 마치도 손길이 아니 미치는 곳의 식물처럼 허술히 두어져 있는 수가 많은 그 탓으로이다.
말로 나타내지 않는, 아니 나타낼 수가 없는 곳에 사람 그 안의 참사람이 속마음의 시냇물을 고요히 흐르고 하고 있음을 저마다 잘 알거니 우리는 한 번씩 성찰의 눈길을 주어야 함도 더 말할 나위 없다. 다른 말로 한다면 사람이 분망 한 생활 속에서 떠밀려 가듯 번잡한 일상사에 시달리며 살지라도 각자의 영혼을 잊고 살 수는 없다는 말이 될 것도 같다. 우리들 영혼의 그 자리 그 모습 그 갈망과 도심의 향방은 유구하고도 불가사의한 물의 수장으로 흐르고 있다.
과학이 만능이 듯 위세를 돋구는 때라 한들 이것만으로는 메꿀 수 없는 인간성의 허점과 그 고독을 우리는 결코 눈감실 수 없을 것이다.
도시 사람의 갈망에 있어 그것이 처음 내닫고 미지막 다다르는 시종의 양상이 모두 실은 얼마 낯설 것도 없는 것, 바로 사랑과 믿음이 아니랴 싶어 진다.
사랑하고 싶고 믿고 싶은 그것, 동시에 사랑받고 싶고 믿음을 지녀주기 바란다는 이 범연한 심리가 결국은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의 지작이요, 그 궁극의 염원일 듯 여겨진다. 신앙 역시도 다른 말로 사랑이요, 바로 신과 사람의 사랑이 믿음이라는 초현실의 한 형식을 빌어 나타나는 그것이라 하겠다.
신은 불가시의 대상이요, 때문에 이를 사랑할여 함은 어차피 믿는다고 하는 신심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까.
그러나 신앙이란 비단 믿는다는 월리 그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신을 믿음으로써 다시 신의 피조물인 인간,
곧 자기를 제인식, 제발견한다는 인식의 순환을 마저 의미하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자아의 긍정과 영혼의 각성이 모두 여기 신의 인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따금 목마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자족의 시간에서조차 어느만큼은 꼭 춥고 허전하고 배고픈 것과 같다. 이 까닭을 풀이하여 실로 우리가 영혼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면 이 너무나 비약이 큰 억지소리 이겠는가. 그러나 분명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제물을 얻고 명성애 에워싸여도 그 나머지 좀체 달랠 수 없는 심정의 기갈은 참으로 영혼 때문이라 생각된다.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향해 부르짓는 목소리와 여기 내 어미는 손이 아직 얼마쯤 외롭고 허기진 것 같기 때문이며 기실 우리의 영혼은 쉽사리 애환의 꽃빛깔에 물들지 않는 그 탓이다.
참다 가치 있는 것과 가급적이면 영원한 것을 원한다면서 좀 고독한 것과 같이 있는 사람의 존재성.
감정의 풀잎들은 한 가지 풍향을 쫓아 손쉽게 몸을 뉘이지만 영혼의 수목들은 좀체 자기를 접어서 굽히지 않는다.
이는 그만치 영혼이 높고 고구한 탓이랄 수밖에 없다.
정신을 존경하지 않는 물질적 부흥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우리는 안다. 마치도 사랑에 있어서 정신을 돌려세운 육체의 애찬 따위가 어떻게 권태로우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모멸을 이르키기도 함을 잘 앎과 같다.
실로 그 때문에도 영혼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며 때문에 미상불 신앙을 시인할밖에 없다. 참으로 신앙은 인간의 그 쓸쓸한 이탈을 고쳐주며 하나의 본향 으로 귀인케 한다라고 친다면 신앙이 없는 인간은 태초의 할배 할미를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하기야 신도 사람이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도 무신론자와 같이 얘기하는 것이 되버린다 한들 나는 간혹 이러한 역설에 말려 드는 걸 어쩌할 수 없다. 사람을 만든 이 가 신이라는데 신을 창조한 것이 사람 같지만 여겨도 지는 건, 사람이 얼마나 인간 스스로의 유한을 서러워했으며 생명 그 형상의 허무를 아파했는 지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데에 유연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혼과 불후는 인간 정신이 추구해 온 가장 뜨거운 갈망의 석탑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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