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노인/황인숙

ivre 2010. 7. 26. 23:53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