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두번째 이야기

ivre 2011. 4. 13. 18:23

 


하고 싶은 말이 얼마간 비슷하다. 말에도 계절이 있어서 그 다음 절기로 바뀌기 까진 한 가지 뜻의 둘레를 맴돌게 되나보다.

그리고 내 어법에는 몇가지 타성이 생기고 있다. 그 첫번째가 말의 우회이다.

내겐 말의 금기가 있다. 하필이면 한 점 원심이 될 그 한 마디를 한사코 덮어 둔다. 실로 그 때문에 산탄의 비를 맞는 환란의 새떼와도 같이 나의 말들은 무참히 죽어 낙하 하곤 한다.

나는 해운대에 갔었다. (거가대교가 생긴 덕분에 2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가 한시간 정도로 단축되어 부산을 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단지 하루의 낮밤을 그곳에서 머물렀지만 먼 수평선에 저물도록 눈길을 주었었다. 일물은 쉬이 왔다. (내가 사는 통영의 일물보단 못했지만) 수목화처럼 차츰 색조가 단조로와 지고, 연이여 달려 오는 파도에선 정작으로 묵향과 소금기가 함께 서렸다.

어둠은 자욱한 검은 안개.

밤의 수평선은 웅휘(雄輝)의 묵필이 한 줄의 곧은 선을 금그은 그것이였기도 하지만 하나씩 둘씩 젖은 불빛이 물결위에 흔들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먼 어선들이 거기 아슴푸레한 뱃전에 동백꽃 같은 등불을 켜 놓은 것인 줄을 알 수 있었다.

한 밤에, 출렁이는 섬광을 골고루 사방에 뿌리며 돌아가는 회전등대, 잠자지 않는 야경의 고달픈 맥동인 그것. 그 밤에 나는 비수에 찔리듯 말의 우회의 그 엄청난 비참을 알게 되었다. 깊은 죄엄의 몸서리처럼 오던 자의식의 통증, 생소하고 생소하고 터문이 없다 싶은 그 상흔. 하긴 참 이상했다. 가책을 동반하며 다가서는, 뭔가 건강한 적나에의 충동.  말하고 싶은것, 꼭 말해야만 배기겠는것. 그렇지, 말핸야지.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기필코 그 말을 나는 해야지.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나머지 지금은 돌의 침묵 같이 얼어붙은, 어둑하고 측은하고, 가슴도 닫힌 그 말에게 촉촉히 빗물이 괴게 하고 봄의 이름이 말머리에 붙는 온갖 은성한 기운으로 채워 주어야지.

봄 햇살, 봄 산정기, 봄 아지랭이와 봄 진달래, 봄벗꽃과 봄 몽련, 봄 과수원, 봄 혼례, 봄 종소리, 봄 달밤, 봄 편지, 봄 시냇물, 봄 해후, 있는것으로 말 하면 한량도 없이 있다.

그렇다.

농도야 말로 진량의 가장 촛점이 된다. 농도가 큰 진실이거나 할 때, 농도에 압도되어 까무라치는 일마져 생기는 것이니까. 농도에서 절대인것의 어느 성질은 이를 함부로 말하기조차 못함을 아는 이는 알리라. 말의 터부가 또한 그래서 생긴다는 것을.

진하고 더 진해만 지는 것에의 외포(畏怖), 그건 정말로 공포일 수가 있지.  밤이 칠흑보다 짙고, 사막이 해돋이의 불타는 진흥보다 짙고, 가장 순연한 흰 빛의 순백보다도 진한 무엇이라 이를진댄 어찌 그 빛이 무섭지 않고 배길 것인가.

사랑아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사랑이란 아득하고 푸근한 이름, 그건 때때로 미움을 섞으면서조차 달갑고 더 속으로 스민다 하겠는데 이건 생판 그렇지가 못하다.

나는 이런 말을 듣는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했었지.

그대가 사랑을 말할때, 어쪄면 그렇게도 아프고 무참하고 절망이 앞을 서는 얘기가 되느냐고.

언제가 이런 들은듯 하다. " 당신의 글과 시 속에는 읽게 되는 사랑의 글귀들이 왜 그처럼 아프고 외로와서 숨막히게 합니까? "

그 사람은 정면으로 이렇게 반문했다.

그 사람의 말이 옳았을까. 그렇다면 그 까닭에 대하여 충분한 대답이 내 속에서 솟아올라야 한다. 헌데 그렇지도 못하다. 사실로 말해 나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건 한없는 목마름, 불의 사막을 헤매는 끝없는 기갈일 뿐이다.

담을수록 그 그릇은 비고, 쌓을수록 그 염원의 벽돌은 남아 돌기만 한다. 헤아릴 수 없는 되풀이의 낙과의 비참.추운 밤길에 쫒기는 배회. 쉽사리 돋아 나는 절망의 가시들. 모든 감관이 예민하고 섬세해져서 건듯 부는 실바람, 실비에도 속살이 닿는 마멸을 입는다. 왜 그냐고 묻는다면 말하리라.어차피 현답은 못 되는 나름으로 그 필연을 나는 이렇게 풀겠다.

준령에 매단 꼭 한 오리의 로프, 생명을 내어 마끼는 유일의 여건. 마지막 하나뿐인 화살을 활시위에 꽂고 호흡을 조절 하는 그 때의 긴박감. 절대라고 믿는 그 외로운 신앙.

그렇다. 사랑은 제일로 고독한 종교이다. 그리고 신앙의 몰입, 그 가운데선 아무리 어설픈 사람이라도 결코 개종의 궁리에까지 타락하진 않는다.

하나란 본시가 외로운 숫자.

불멸의 한밤을 담배로 달래는 이 사내에게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는 무섭게 심각 하다.

마지막 약봉도 그렇지.

또한 지금의 이 악곡이 이 세상 최후로 듣는 음악이라면? 임종의 기도라는 것도 있다.

그래, 정녕코 그게 사랑이라면, 어째도 유일과 최후의 자각속에 잉태될 밖에 없고, 모르면 모르거니와 그 비길 바 없는 고절과 부절단은 탄원을 피할 도리란 결단코 없을 성싶다.

그렇지.

양식진주의 원리를 빌어 보자.

진주를 품게 하려면 반드시 진주조개 살을 쪼개어야 한다. 불 같은 칼날이 무참히도 연한 살을 후비고 들어가면 극도의 아픔으로 살이 오므라들고 기식도 멎을 듯한  그때 그 상처에  훗날 한 알의 진주가 깃들인다고 한다.

사랑뿐이 아닐 테지.

다른 무엇이건간에 그것이 그 사람에게 진주를 잉태 하는 열망이 될 때, 매양 불 같은 칼날 앞에 벗은 속살을 드리대고 남김 없는 고통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하긴 이런 말들이 잔인한 화법일것 같다. 그러나 어쪌수도 없는 분명한 사실이 이것임을 내 무슨 수로 덮어 두랴.

하면 상처를 겁내지 말거라.

사람들아, 그대들의 능력이 미치는 한, 상처와 시련을 무한정 기거이 용랍하거라. 하등의 인간적 고뇌없이 밥만 먹으며 살기 보다는 껍질을 째고, 새 순을 블러 내는 나무가 되어 보는건 어떻겠는가. 살을 자리고 진주를 품자.

그러나 회의는 무궁하다.

시시로 달라지는 농도, 움직이는 시공, 완만하거나 급격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차피 일체의 가치가 변모하고 사람의 마음도 바뀌는것을. 그 나머지 사람은 불변의 서약을 좋아 하게 되고, 이건 점차도 도도한 유행의 풍조를 이루었다.

결혼도 서약해서, 입학이나 입교도 서약에서, 혁명도 서약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미속인가 ?

하긴 나에겐 아마도 너무 분석 하는 버릇이 있다. 분석은 각박한 지헤이며 때때로 그건 예상을 상회하여 불길한 결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마치도 사람의 생명이 그 삼장에 있다고는 하겠으나 막상 심장을 갈라놓고 보면 생명은 도망가고 없는 경우에도 비길 수 있을 것 같다.

"목발의 길이도 세월과 더불어 점점 길어져 갔다. 신어 보지도 못한 채 쌓아둔 외짝구두의 수효를 보면 슬프게 걸어온 거리가 짐작 되었다" 이건 이상의 싯귀이다. 그는 자기의 두 다리가 서로 다른 길이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두 팔을 끓어 버리고 나의 직목을 피했다" 고 했으며 "역사는 중하이다. 세상에 대한 내 사표의 서식은 더욱 중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에겐 각기 저마다 받은 혈별의 양식이 꼭 있다. 이 상의 받은 벌과는 첫째로 권태였던 것 같다.

조숙, 조로, 그리곤 300년이나 살아버린 심심한 산신령처럼 나오느니 하품뿐이였다. 게다가 죄없는 낙천주의가 덧붙어 그의 문학은 자못 가관인 바 있다.

생명의 자각엔 여러 성질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또 유동적 이여서 복잡 미묘해진다.

그러나 모름지기 몇 가지의 충족만은 공통의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먹고 자는 것에 욕구, 정과 지의 욕구 따위, 이러한 보편성 외에 정직하고자 원하는 충동도 있다 이것 때문에 일기를 적고 대화를 바란다.

사람은 벗고 싶다.

온갖 가식을 벗고 순연한 나신으로 그 무구의 눈부심을 누리고 싶다. 정신위생을 위하여도 이는 불가결의 욕망이요, 세찬 회오리바람으로 불고 가는 분망한 충동이다.

문학도 필경 여기에서 내딛는다 하겠거늘.

표현해야만 살겠는 것, 가급적이면 더 정직하게, 더 속속들이 표현할 수 있어야 살 수 있겠기에 나도 문학이라는 것을 시도해 봤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문학이 내 손을 잡고 가르쳐 준 더 많은 것은 말의 은유, 말의 우회, 정녕 말의 숲속에 나의 진실을 잘  숨기는 그 비방잉던 것 같다.

말을 겁내지 않고, 오히려 말의 자재를 얻어 있는듯이 쉽게 말 하면서 말의 진실을 다하진 못하는 말의 범법, 이를 어쪄면 좋단 말이냐. 간혹 성직자가 교리를 끌고와서 교묘히 자기 호신을 하는 수가 있다. 법학자가 법의 맹점을 이용 한다. 군중의 선동자가 그 개인으로선 가장 무용한 이기주의자일 수도 있다.

진리를 회손하는 교직자.

백성을 파는 위정자.

그 밖의 더 끔찍한 대하여선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요는, 사람의 본 위치로 돌아 가는 행적내지는 노력이, 또는 본연의 자세에 대하여 그 향수나마 가져야겠다는 그런 논리가 될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가지만, 하나 생각키 나름으론 무겁지가 않다. 본래의 몸무개가 그만하다고 여긴다면 중량감의 압박을 가히 면하기도 하리라.

내 말의 지둔, 그 지나친 우회, 쓸쓸한 내면의 미로 같은,,,,,,,,.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만 있진 않겠다. 언젠가 물살도 깊은 호심이 한전 원심을 짚어 나는 단호히 말 하게 될것이다.

그렇다 반듯이 그래야지.

다만 이때의 청중이 반듯이 여럿이라는 전제는 없다. 어져면 꼭 한 사람이 들어 주게 될지도 모르고, 꼭 한 번, 꼭 하나의 장소만이 여기 쓰이는 최대한의 요구이며 동시에 그 완전한 충족이 될는지도.

우수와 연민과 희구 속이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우리의 주위에도 있어, 얼어붙은 듯이 차갑고 비정한 사람이 끼얹어준 추위와 손시려움이 사람 앞에서 고맙게 녹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매 턱없이 비정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저들은 남달리 배고픈 사람이고 자기의 공백 때문에 친구에게 배풀 여력이 없을 뿐이리라.품어주고 따습게 먹여도 주면 이제 아침 햇살처럼 번듯이는 웃음을 지으며 이리로 걸어올 것이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할 것이다.

서로의 눈엔 글썽이는 맑은 눈물이 새벽 이슬 같이 괼 것이다. 우리들이 가장 신중한 단안은, 할 수 있는 한 이르 늦추어야한다.기다리는 이는 그 능력의 극한까지 되도록 길게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지혜이다.

아아, 내 소망을 5월 산하에 커다할게 부풀려 이르켰으면 좋겠다.

가장 큰 환희로써 삼라의 모든것을 차례로 이름부르고 싶다.

위로에서 버려진 친구들은 어디 있나?

압도적인 우월 감으로 그대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은 어디 있나?

중환자에게서 떠나듯이 그대의 여인이 그대를 버린, 그대의 포부가 그대를 배신하고, 그대의 주인이 그대를 팔아넘긴 비탄속의 내 친구들은 대답하라.

상처를 이기며 일어서는 사람의 영광 .

몸의 상쾌한 바람조차 지극히 달가운 오늘, 우리는 어디까지 사람일 수 있는가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자.

견디는 힘이 극한, 더 바라는 힘이 한도를 재자.

사람에겐 벗이 있다.사람의 구원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절대적 신은 하나이고 사람은 여럿이다.

이 사실이 실로 범연치 않다.

이 성질의 항구에 우리는 때때로 기향하자.

아마도 우리가 가장 약해지고 외로와져 있을 때 이 일은 생겨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