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 91

한 여자에게서 꺼낸다/장석주 (배경음악 Musa Dieng Kala - Kalamune)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내 이름 아닌 누군가의 이름, 열 마리의 죽은 비둘기, 태어나지 않은 두 명의 아기, 유효 기간이 지난 슬픔 다섯 개, 곰팡이가 핀 그리움 하나를. 나는 꺼낸다, 당신 가슴속에서 서른 세 번 속절없이 지나간 여름, 취해 잠든 열다섯 번의 밤, 한 번 실패한 연애, 구두 뒤축에 묻어온 무수한 바닷가의 모래알들, 언젠가 잃어버린 한 개의 지갑, 빈 담뱃갑처럼 구겨서 버린 꿈, 인생의 텅 빔을 이기지 못했던 절망의 스물한 날들, 아니다, 아니다라고, 포개했던 순간들의 알약 같은 쓰디씀을.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배경음악 Francis Cabrel - Esta Escrito)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으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의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선운사에서 / 최영미 (배경음악 - Terry Oldfield - The Africans)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잠글 수 없는 무개 / 배 용제

한밤중. 어둠 한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수돗꼭지 속 혈은 귀통이로부터 빠져나오는 울음의 찌꺼기. 욕실 새면대 위로 잠기지 않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수도꼭찌 끝에 잠시 웅크리며 온 힘을 다해 끝어 모은 동그랗고 작은 무게가 고인 어둠을 두드린다 아무리 비틀어도 잠글 수 없는 무게. 헐어 버린 분량만큼 연거푸 흘러나온다 곤두서도록 귓속을 파고드는 또렷한 소리가 된다 어둔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된다 단 한번의 소리를 위해 스스로를 깨트려 열린생을 짧게 마감하는 무게는. 좁은 관을 통하여 세상 밑바닥을 흘러 오는 동안 잠기거나 막혀 터질것 같던 시간과 쉽게 쏫아져 버린 기억의 해방. 녹슨 구석에 고인 무게를 비틀어 조인다 목올대 끝으로 거친 압력으로 밀려오는, 내 혈관과 신경줄을 흘러 다니는 것들의..

노인/황인숙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편도 1차선 / 이 진수 (들으시는 음악은 / Agricantus - Amatevi 입니다)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 길을 가다 보면 심심찮게 나무들이 차를 세운다. 태워 달라고 특유의 맑은 종아리를 쑥쑥 내놓는다. 그럴 땐 참 아찔하다. 허벅지 보고 뭐 봤다는 식으로 아찔 앗, 질 해 가며 나무의 은밀한 부분을 힐끗거리게 된다. 길에서 차 세우는 나무 중엔 저를 열어 주는 나무도 있다는데, 저 은사시나무를 태우고 바다 근처 바닷가에나 갈까. 가면서 슬쩍 맨 아래 가지를 당겨 볼까. 물관부 체관부까지 전진해서 나무와 몸을 섞으면, 내게도 물이 흐를까. 이파리가 다시 돋아날까. 막상, 새 잎이 돋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상할 것 없으리. 편도1차선의 비좁은 생을 그때쯤이면 거의 빠져 나갈 수 있을 테니, 뒤쪽으로 미끄러지는 풍경들에 손을 흔들며 가까운 해안선을 끼고 나무와 하룻밤 긴 밤 자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