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잠꼬대 1011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배경음악 Francis Cabrel - Esta Escrito)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으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의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선운사에서 / 최영미 (배경음악 - Terry Oldfield - The Africans)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두번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이 얼마간 비슷하다. 말에도 계절이 있어서 그 다음 절기로 바뀌기 까진 한 가지 뜻의 둘레를 맴돌게 되나보다. 그리고 내 어법에는 몇가지 타성이 생기고 있다. 그 첫번째가 말의 우회이다. 내겐 말의 금기가 있다. 하필이면 한 점 원심이 될 그 한 마디를 한사코 덮어 둔다. 실로 그 때문에 산탄의 비를 맞는 환란의 새떼와도 같이 나의 말들은 무참히 죽어 낙하 하곤 한다. 나는 해운대에 갔었다. (거가대교가 생긴 덕분에 2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가 한시간 정도로 단축되어 부산을 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단지 하루의 낮밤을 그곳에서 머물렀지만 먼 수평선에 저물도록 눈길을 주었었다. 일물은 쉬이 왔다. (내가 사는 통영의 일물보단 못했지만) 수목화처럼 차츰 색조가 단조로와 지고, 연이여 달려 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