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잠꼬대 1014

오래된 수틀 / 나희덕 (배경음악 Francis Cabrel - Esta Escrito)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 팽팽한 그 시간 속으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의 구름은 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선운사에서 / 최영미 (배경음악 - Terry Oldfield - The Africans)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두번째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이 얼마간 비슷하다. 말에도 계절이 있어서 그 다음 절기로 바뀌기 까진 한 가지 뜻의 둘레를 맴돌게 되나보다. 그리고 내 어법에는 몇가지 타성이 생기고 있다. 그 첫번째가 말의 우회이다. 내겐 말의 금기가 있다. 하필이면 한 점 원심이 될 그 한 마디를 한사코 덮어 둔다. 실로 그 때문에 산탄의 비를 맞는 환란의 새떼와도 같이 나의 말들은 무참히 죽어 낙하 하곤 한다. 나는 해운대에 갔었다. (거가대교가 생긴 덕분에 2시간 이상 걸리던 거리가 한시간 정도로 단축되어 부산을 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단지 하루의 낮밤을 그곳에서 머물렀지만 먼 수평선에 저물도록 눈길을 주었었다. 일물은 쉬이 왔다. (내가 사는 통영의 일물보단 못했지만) 수목화처럼 차츰 색조가 단조로와 지고, 연이여 달려 오는 ..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 (배경음악 Kalliopi Vetta - Na M'agapas 입니다)

처참히 상처 입었던 그가 불덤불 에서 꺼낸 칼날 같은 신생을 외치게 하면 좋겠다. 불로 구워서 두드려서 날을 세운 청결하고 강한 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을 쓸 적에 지극한 애련을 혼신으로 깨닫게 하면 더욱 좋겠다. 애련은 우리만큼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곱씹게 되는 참 뼈저린 삶의 미각 아니던가. 따습과 성실한 눈이 떠서 삼라의 모든 점을 새로이 살펴내게 하였으면 좋겠다. 집을 받들고 선 주춧돌이 그 파묻힌 밑뿌리까지도 떼놓지 않고 품어 냈으면 좋겠다. 생명 있는 것이 다다르는 마지막 처소를 묵상하고 마지막 모습들을 낱낱히 공손하게 어루만지게 하면 좋겠다. 울음이려면 울음이게 하고 소망이게 하려면 또 소망이게 하였으면 좋겠다. 행여는 뿌듯한 응감에 속으로 죄어드는 가슴, 무겁게 엎드린 침묵..

이름도 못붙일 침울한 시

언제부턴가 침울한 시를 쓰기 시작 했고 침울한 피사체에 셔터를 누르기 시작 했다. 한약같이 쓰고 겸은 윤을 흘리는. 그건 건조한 열풍에 살결을 태우는 갈망, 거기 마른 갈잎이 사운대는 바람을 안아도 이미 소리내지 못하듯 까맣게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채 손만 닿아도 부스러지고. 마지막 줄에 자신의 삶을 몽땅 내마낀 저 죽은 거미 처럼. 산다는건 어딘가를 가는 일, 느린 목선을 타고 신간의 물이랑을 시간 동안만 흐르는 일이다. 영원을 향해 가고 있듯이 더 멀리 더 오랫동안 흐르고 싶어 했을 것이고 저 거미 역시도 생존을 위하여 사력을 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영혼으로 다가서는 만남 그 겸허한 충족, 이슬에 씻기우는 아침의 과일처럼 신선한 축복에 있고 싶어 하고, 온 몸으로 울리는 현악기라서 한 존재의 고..

비는 수직으로 서서 꼬꾸라져 죽고 있는 밤에

오늘 내 영혼을 연다. 이는 내 마지막 영역이다. 우리는 멀리 왔다. 얼어 붙은 강 위에 떨어 지는 백설을 바리 보며 나는 이 생각을 했다. 우리는 멀리 왔고 그리고 앞으로 더욱 땅끝과 하늘끝이 맞붙은 그곳까지가련다고. 사랑이란 참 어림 없는 결단.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도정인가를 지금에야 알겠구나.이루 잴 수 없는 내면의 충일과 감춰진 손의 무한량한 도여가 아니면 갈 수없는 길인것 같다. 단순한 열정이기 보다 단순한 기원이여야 하며, 성급한 서약이기 보다 맹세를 늦추는 신중한 생각, 겸양을 앞세우는 명백한 결단 이여야 한다. 그건 감미로운 도취가 아니고 끝임없는 현실의 가지끝에 맺히는 겨우 열마간의 담백한 유열일 뿐이다. 많이 바라면 그만큼 낙망을 더하게 되고 절재속에 조금만 바람을 드러내면 매번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