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잠꼬대 1003

마지막 편지(遺稿) (배경음악/ 기다림의 테마 (O.S.T - 산책)

장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이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Ich lieb..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구부러진 길 저쪽 (배경음악 Bill Douglas - Earth Prayer)

그녀는 그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읍의 외곽 구부러진 길을 통하여 이곳에 왔다 망토처럼 걸친 옷차림, 전혀 다른 내용이 쓰여진 서적의 표지처럼 낯설고 거추장스러웠지만, 들쳐보면 어디서 내용을 빠뜨렸는지 아무것도 없는 빈 백지 뿐이었다 어느 고장이든 이런 소품은 있는 거라고 한적한 읍내 풍경에 심심찮게 진열되곤 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웃음을 게워냈다 몸 속엔 웃음 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웃음을 전파하러 온 순례자처럼 온종일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어느새 아이들은 그녀의 신도가 되어 뒤따르며 곧잘 흉내를 냈다 흰 습자지 같은 웃음은, 그러나 깃발처럼 흔들리며 창백한 한낮을 배회했다 착한 사람들은 동정 따위를 들고 모여들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제작기 지난날의 신분에 대해 추측하면서 백지..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그녀의 깊은 속 (배경음악 한태주 - 노을꽃)

들여다본다, 깊은 그녀의 속 그곳은 이미 입구부터 어두웠고 내 눈의 검은 창엔 검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검은 문고리를 더듬더듬 만지며 핥으며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담이 있고 창이 있고 식탁이 있고 텃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온통 검은 것들이어서 처음엔 여기가 우주라는 걸 영 몰랐다 핥고 부벼대면서 그 익숙한 맛과 향기에 나는 한 생애를 기억해낸다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때 그때, 검은 세계는 검은 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요람이었고 늪이 놀이터였고 함께 숨쉬던 내 일부였다 온갖 비밀이 내것이었던 생애, 검고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비밀들 이제 검은 것을 보지 못한다 빛을 관찰할 능력 외 대부분의 시력을 잃었다 이후의 생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전혀 안 보이는, 내 존재의 ..

배용제 / 삼류 극장에서의 한때-자서 (배경음악 Altan - Slainte Theilinn)

가만히 들여다 보면, 지상은 온통 놀라움으로 이루어진 화면이다. 신비로움, 신비로운 고통들, 지독한 경험과 뒤통수를 노리는 공포들, 나는 그것들과 마주칠때마다 늘 경이로운 탄성을 지른다. 길들과 문들은 모두 죽음이나 파멸 따위를 향해 열려 있으며, 생존하는 것들은 그 통로에서 한 발짝도 벗어 날 수 없다. 다만 삶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버거운 짐짝을 메고 그곳을 한 세월의 구멍을 팔 뿐이다. 지루하고 평이로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길 자유란 소멸이나 파멸의 세계에 있다고 깨달은 무의식의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이후에도 내게 시라는 투명한 렌즈가 들려 있는 한, 나는 무수히 많은 경이로움들을 발견할 것이다.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연거푸 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