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걸음마를 시켜 본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난 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을까.
제탁을 생각해 본다.
실박한 네 다리를 높다라니 뽑아 올리고 그 위에 판자 하나를 깐다.
이 과정을 무척 공들이고 정밀한 목조각 으로 이루이 내는 소도 있다 왜 그럴까. 제탁을 무엇에 쓰려 하기 때문일까.
대답은 아주 쉽다.
제탁을 만드는건 촛대 하나를 올려 놓기 위해서이고 더러는 과기나 향로를 얹어도 둘 쓸모를 위한 마련이다.
어느 특별한 하루나 한 시간을 위해 우리의 시간에 아득히 쌓아 올려 지고 그 아찔한 꼭두에 고귀한 한 보람이 잠시 피어 오르기도 한다.
빛과 그늘이 한시에 숨죽이는 오직 유례 없는 시간.
가령 장미 한 송이에 있어 그 진미의 사간은 불과 5분간이라지만 한 정신과 그 정신이 빛어 내는 시간의 정점이 또한 그리 길다고 보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전혀 한번도 이런 이런 걸 누려 보지 못하는 이조차 하고 많은 줄 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함에 있어 특별한 몇몇 성인을 인류 역사는 소중스러이 기억해 오고 있다. 가령 예수 같은 이를 들어 본다면 쉬이 수궁이 갈 것이다.
그러나 좀 다르게도 볼 수 있다.
에수처럼 절대의 산정에 올라 있진 않아도 더 작은 산에 그 사람이 아니면 그곳이 무너지는 소중한 분들도 있다. 그것은 한 가정이거나 하나의 작은 마을,
혹은 대수롭지 않은것 같은 직장일 수도 있으리라. 어쩃든 꼭 요긴하고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이 여기에 십분 귀하게 불리어 질때 그네들은 정녕 땅의 소금이라 할 것이다.
진실로 그들에겐 오래 전에 예비된 사명과 축복이 있었을 줄로 여긴다.
내가 살아 온 동안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도 별달리 아름답ㄷ고 값어치가 높던 이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사명을 발견할 줄 알며 절대의 목적 아래 자기를 통합해 바치고
아낌없이 전생명, 전 생애를 던지는 아들은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저네들은 가장 외떨어진 고독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낚여진 슬기와 숭고한 장미는 말 없는 깊은 감동을 자아내어 영 잊을 수 없게 해 주었다고 증언하고 싶다.
무슨 일에서라도 미리 그것을 마련한 손길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첫새벽 어둑한 뜰에 내려 서면 거기 밤새워 화초를 보살피던 누군가가 고요히 자리를 일어 서는걸 느낄 수 있다. 수런거리고 서걱이면서 대지 위에 쉬지 않은 역사를
퍼내던 손길이 축축한 밤 공기에 젖으며 분주히 움직이 지던 일을, 설사 닫힌 유리창 안쪽에 한 겹 커튼을 드리우고 누위 있었다 해도 우리가 몰랐다곤 할 수 없으리라.
이른 아침 뜰에 나가보면 그들이 역사한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고 국화의 꽃망을이 눈여겨 부풀어거나 시들어 떨어진 잎사귀 속에 가멸하게 물기가 스며든 그만큼의
자취에서도 우리는 능히 그것들의 흔적을 알아 차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의 만남이 모두 우연하지 않다. 땅 속의 보리라 할지라도 회춘의 가약 엎에 내놓은 무진 인고의 값비싼 봉헌인 점,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산의 수목, 그 잎잎이 비슷하건만 거기서도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작정되어 있고 피어나는 꽃망을의 차례마저 정해저 있다고 볼, 정연한 질서와
누락 없는 섭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일어 버린 것은 그 빈 자리에 버섯처럼 솟아 오르는 얻음이 또한 있다.
다만 상실은 삽시간에 행하여 지고 새로은 수급은 지리하게 조금씩 이루어짐을 우리는 안다.
생명은 보이지 않게 자라는 자궁 안의 긴 시간을 발판으로 피고 있다.
그래 그 꼭대기에서 피워 내는 오랜 바람이 고귀한 보답이라 하겠지만 죽음은 마치 잠시 동안에 침물해 버리는 배와 같이 허술하다.
처음으로 얻게 된 것에 얼마 동안 낮이 설어 좀처럼 알아 보려 들지 않을 때도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마저 잃어버린 후에야 허전한 빈 자리이 또 하나를 보아 낸다.
우리 중에 이런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족히 예지의 한 조각을 얻어 가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예지란 그것이 아무리 미비한 부스러기이더라도 그걸
얻는 데엔 사람의 큰 능력이 요구 된다.
상실에 있어서 매번 과민한 것이 사람이라 싶다.
이 까닭은 사람에게 손실을 싫어 하는 천성의 육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용 현재의 자산엔 등한 하기 쉽다. 주어진 것이 만심 하는 일도 상실의 한 가지 형테일터인데
사람이 사람 그 자체를 업신여긴다는 느낌을 또한 금할 수 없다.
자기 자신까지 포함 해서 인간을 비하 하고 지나치게 굴종을 손쉬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비교를 초월하는 절대의 개체요, 다시 없이 보배스런 소우주를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무상인 성질 그 안에 처신하며 우리를 자신의 유일한
나를 기꺼이 내어 준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이나 정열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헌신이 욕구 앞에 인색하지 않음은 우리의 너그러운 낭만이요, 실로 멋진 취미라고 할 만하다.
반면에 스스로의 감정이나 행동거지에 가격표를 매기고 더우기 절대로 밑지지 않으려고 도사리는 사람 속에 싸구려 비하를 저지르는 수가 많은 듯이 보인다.
위대한 스승이 천천히 다니시며 간혹 당신의 얼굴을 드려다 보고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언즈시기도 한다.
그 위대한 스승은 시간 속에 있으며 번뇌속에, 그리고 좌절과 소망 속에도 사시는것 같았다.
계절의 흐름 안에 또오랜 병석의 머리맡에 서기도 한다.
사람은 보다 더 무형의 것을 소중스러이 지니고 산다
모조리 문이 닫히 작은 집에서 처럼 암울해 있을 때 목마르게 부르는 구원의 이름이 내게 있어선 고독일 적이 많았다.
내 영혼을 맨 먼저 찾아 주신 분은 나이 태초의 할배와 할미이셨지만 내가 이 일을 알아 차리도록 도와준건 고독 당신이던 것이다.
가난한 오성의 문턱에까지 나를 데려다 준 이는 언제나 고독 당신이였음을 나는 썩 잘 기억 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나 사진을 찍는 일이나 사람의 속 마음을 탐색 하는 일은 퍽이나 괴로웠다.
구슬을 캐려고 돌 밭을 헤집던 끝에 종내 돌에 절망하여 까무라치듯 글이 어렵고 사진이 어렵고 사람이 어려워서 꼭 죽을 것만 같던 그런 일인들 잦았었건만
한 점 바늘 끝만한 빛이 있어 나는 그걸 따라 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을 달라고 하루 종일을 앉아 기다리는 일, 모두가 떠난 거리에 앉아 멍하나 보도불럭을 바라 보며 말을 걸었던 일 기적의 눈을 빌어 가락이 긴 주문을
외웠다고 할 것인가. 어째든 내가 알게 된 것 중 가장 복잡한 고뇌의 촉매가 고독 당신이였기에 내가 버릴 수 없는 마지막 보루 역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고독 당신일 밖에 없다고
나는 고백 하고 싶다.
가령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감각이 서로 이어지는 신경조직으로 두 사람이 생겨 났다면 어떨까.
도망치는 일과 속속들이 함께 느끼며 사는 일의 두 가지 중에서 어느쪽을 짚어 선택한 것인지를 알고 싶다.
당신이 누구와 더불어 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나라면 또 어떻게 했을까.
그러니 지금은 대답 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말고, 몸시 아끼는 것과 같이 여러번 되물으면서, 오랜동안 생각해 보자.
가슴 한복판에서 종내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나올 때를 기다려 보자.
나는 종교인이 아님에도 기도를 줄곳 잘 한다. 이를테면 마지막 기도를 하고 난 사람 같이 마음이 갈앉아 주기를 바랄 적이 있다.
마음속의 방황은 한결 다스리기 어려우며 평생을 다 살아 버린 듯이도 못 견딜 피곤에 휘말릴때가 있다.
바람에 찢긴 지연이 선신주에 매달려 상승과 낙하의 두 가지를 다 못하게 되었듯이 내 영혼도 허적한 진공속에서 일체의 과제에서 손을 떼고 표표히 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때 내 영혼의 뒷 일을 주관 하는 이는 누구인가. 구부러진 나뭇가지에서 여념 없이 익은 청과일의 신앙을 나에게 가르쳐 줄 이는 누구인가. 말로는 나타낼 길 없는
고뇌의 늪의 어둡고 끈적 거리는 수질을 살펴 줄 이는 누구인가.
나의 지병은 여러 가지이다.
서성거리고 기읏 거리며 항시 외각을 도는 일에 내 대부분의 시간을 써 버림도 그 한 가지라 하겠으니, 사랑을 하고 있는 이가 슬퍼 하고 방황 하고 절망한 나머지 기도하듯이
나도 노상 그것들과 엇비슷한 감정의 과정을 밟아 가곤 한다.
고백 하면 책이나 종교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엔 좀처럼 익숙해 지질 못했다. 진실이 머무르는 표목은 많은 것이언만 태만한 나는 대체로 그것들과 무관하게 지내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격렬한 회비에 남김 없이 묶여 통어 되었던 있었을진대 그건 내가 사랑을 품었던 때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우습겠지만 나는 사랑 할 때 기도하고 사랑이 간 후에도 기도 했었다. 따라서 언제나 사랑 때문에 기도 했다고 말해야 한다.
내 정신이 벌거 벗은 진실을 숨길 까닭이 있을까. 나는 지금 조금도 주저없이 모든 것을 다 얘기 하고 있다. 낙서라는 그 한없는 가벼움을 빌미로.
내 영혼의 고독한 안개.
그렇다.
비단 나뿐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사람은 누구나 먼젓 세상에서 데리고 온 외로움을 그림자 삼아 살도록 마련이며 그 고독인들 어찌 한 두 사람만이 것이라고 하리.
공원의 물을 나누워 마시듯이 고독을 나누어 삼키면서 우리는 살아 가는 것임을.
쏴! 물을 뿌리듯이 싱그러운 이른 3월의 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 온다.
흐득흐득 비누처럼 풀려 뽀오얀 비누거품을 일구는 내 사념의 섬약한 살결을 애무해 준다.
격렬하고 산란한 자의식의 아프고 위태한 시간
나는 날마다 한번씩 운명을 결정하고 날마다 한번씩 비수에 찔리는 불길한 병을 앓고 있다.
젊지 않은 나이에 고아와 같은 심성의 방황이 또한 나의 병임을......
니미럴 병도 참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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