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유곡에서 허덕이며 육체도,정신도 만진창이가 되어 지내온지도 근 한달이 되어간다. 왜, 나도 모른다.
아주 오래간만에 글 한 줄 써 보려고 술 한잔을 빌려 의자에 앉았다. 감성이란 놈이 절실 해서 이다. 무얷을 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써 내려 가 볼까 한다.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 하다. 밥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 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 되는 것이다.
정년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내 육신이 땀에 젖어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행구고 손을 모아 태초이 할배와 할미에게 기도 드린다면 필시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날아 오를 것이다.
겨우 한 발자국 내디딘 발걸음에 불과 하다 해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언젠가 목적의 땅에 다다르게 될 필연의 약속임도 믿을 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신은 결과를 지배 하시고 사람은 과정의 권리를 차지한다. 과정은 사람의 몫이나 최선을 다하는 이상의 인간적인 힘은 없다.
좌절할 밖에 없었던 여건을 다시 점ㄱ섬하고 넘어진 그곳에서 몸을 이르킬 때, 비록 또 다시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듭거듭 일어나 걸어 갈 수만 있다면 이는 새벽의 사람이요, 그 시간이 심지어 죽음과 인접한 것이라 해도 시작의 장한 의지는 굳건한 바위가 되어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번을 날아 올라도 매번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박힌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뽑아져 나온 참담한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손잡이를 건진 일은 전부를 당겨 올릴 가능성의 시초이며 성취의 문을 열 열쇠도 되지 않으랴.
우리는 화해를 원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풍성한 추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농기구를 들고 남보다 머저 밭으로 나가야 하고 더 충실히 거기서 일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한 사수이고 싶다.
그렇다면 천번 만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철저한 분발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아아, 이 목마름....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낙타가 제몸 속에 저장했던 물로 갈증을 푼다고 하듯이 최소한 우리 자신의 사랑으로 묵을 추기며 힘을 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감자를 심으면 어미 감자는 땅 속에서 풀어져 없어지고 보석 같은 햇감자들이 그 자리에 엉글듯이 우리의 사랑도 먼저 허리를 구부리고 오랫동안 흙의 능력을 신앙 해야 한다.
소망 중에 인내 하고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결코 너무 늦은건 아니다. 시작은 곧 새벽이 의미이니 창창한 긴 날이 우리를 도와 온갖 보람을 솟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시작 해야 한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잴 수 없는 수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억만가닥의 현으로 울리는 악기와도 같다.
그것은 항상 가동되고 있는 전열기처럼 소모되면서 한편으론 쉴 새 없이 새 피를 채워 주는 또 다른 활력 탱크가 있게 됨이 참으로 놀랍다. 이는 사람이 부여받은 으뜸의 능력이면서 풀려날 길 없는 가혹한 형벌일 수도 있다.
때때로 파도 치는 마음의 경량은 마음 그 전부로서 끓어 오르는 고통의 열탕이기도 했다. 어느날 마음의 빝바닥에 와서 닿는, 아니 각문처럼 새겨지는 인기척이 있었다.
양심의 속 껍질을 찢어 내는 신의 손길 이거나 운명의 첫 달력을 걸어 주는 특별한 만남 이였다고나 할까.
사람의 삶이란 곧 마음의 활동이다. 사람 속의 사람이며 시간 속의 질긴 동아줄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위생과 마음의 보건을 돌보지 않을 수 없고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하게 그 마음을 가꾸기 위하여 각자가 그 자신의 원정이 되어야 한다.
마음 안엔 허공과 공터도 있다.
서예나 동양화에서 귀하게 남겨두는 여백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만년설의 수려한 봉우리를 들어낸 성소가 있다. 첫 추수를 위해 비워 두는 청결한 과기가 있다.
무상무념의 담백과 겸허로 닦고 또 닦는 내면의 거울, 스스로의 영혼이 여기 와서 설핏설핏 그 모습을 비추게 될 이 엄숙한 준비.
사람의 덕성과 품격은 그 자신에게만 책임을 묻게 된다. 마음을 비우는 일과 비워 둔 마음의 어느 끝트머리에 서서 또다시 무언가를 땀 흘리며 담게 될 일의 그 사이에서 어떤 가치와 얼만큼의 생명력을 창조할 것인가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외에 다른 누가 여기에 개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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