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겨울날 단장(斷章) - 황동규

ivre 2024. 10. 30. 17:27

 

Tanja Solnik - Numi Numi



좀 늦었을 뿐이다, 좀 늦었을 뿐이다, 나의 뼈는 제멋대로 걸어가고. 
차가운 얼굴을 들면 나무들은 이미 그들의 폭을 모두 지워버려, 
폭이 지워지면 앙상히 드러나는 날들, 내 그를 모를 리 없건만, 
오 모를 리 없건만, 외로운 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누가 나의 자리에 온다고 하면, 보리라, 각각으로 떨어지는 해를, 
어둑한 나무들을, 그 앞에 그대를 향해 두 팔 벌린 사내를, 그의 눈에 
잠잠히 드는 지평을, 그리고 그의 웃음을, 그대는 보리라. 

어두운 겨울날 얼음은 
그 얼음장의 두께만큼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오랫동안 나를 버려두었다. 
때로 누웠다가 일어나 
겨울저녁 하얀 입김을 날리며 문을 열 때면 
갑자기 내 입김 속에 들어오는 조그만 얼굴 
얼굴을 가리는 조그만 두 손 
나는 알겠다, 언제부터인가 
육체의 쓴 맛이 머리칼 곱게 빗고 흙 내음을 맡으며 
얼마나 오랜 나날을 닫힌 문 속에 있었는가를. 
나는 여기 있다 
미친 듯이 혼자 서서 웃으며 
나는 여기 있다 
너의 조그만 손등에 두 눈을 대고 
네 뒤에 내리는 雪景에 
외로울 만치 두근대는 손을 내민다. 

요즘 와서는 점점 더 햇빛이 빨라져 조금 살다보면 어느샌가 어둠이 내려, 
만나라 친구들이여, 눈 멎은 저녁 모퉁이에서 갑자기 서로 떨리는 손들을 
내밀고, 찾아라, 서로 닮은 점들을, 서로 닮은 곳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잘들 있었는가. 그대들은 어느 곳에 상처를 받았는가. 나도 닮은 곳에 
얼음을 받지 않았는가. 혹은 내가 팔을 벌렸던가. 만나라 친구들이여, 
내 얼은 거리에 등을 붙이고 서서 서로 만나는 그대들을 맞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