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글/내 영혼을 살찌워준 詩

서럽고 서러운/김지하

ivre 2024. 10. 30. 17:15

 

Franco Simone - Al Tramonto

 

 

유년의 한때 아빠는 도망다니고
엄마는 아빠를 찾아
전국을 헤매고
나는
고향을 좋아하고
마당의
작은 꽃을 좋아하던
나는
끌려다니며
끝없는 멀미에 시달리고
그래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랬지
그러나 나의 여로는
끝이 없었지
할머니가 한때

나랑 함께 살자
해도

그럴 수는 없었고
끝없이 끝없이
터지는 데모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누르는 테러에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경찰서에서
아빠는 맞아
들려 나오고
엄마는
되레
외가로 달아나버리고
나 혼자
빈 마당에서
새를 그렸다

그림
바람과 눈물
나는 그림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그림을 못 그리게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고
못 그리게
내 손을
이어서 숯을 끼고 그리는
내 발가락까지 노끈으로 묶어놔
버렸다
버리고 나서 사십 년
이제껏 포기했었다
지난해
엄마 돌아가신 뒤
어느날 밤
잠은 오지 않고
밤새도록 내 마음은
울부짖었다
그림을
그리자
그림을 그림을 그림을
그리자
꽃을 새를 바람을
눈물을
그리자
그리자

나는 살아나기 시작했으니

그 사십 년을 나는
죽어 있었으니
이젠
누가 와
당신 체포합니다
소리 해도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
그림만
곁에 있다면
나는
불사다
내 아이들 둘 다 그림 그리고
내 아내도
그림 그리고
우리는 다아 그린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아마도 내 마지막 꿈은
늙어서
꼬부라져 늙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장 거룩한
춘화도
한 잎
그리다 가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가장 더러운 씹그림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장 숭고하고 심오하게
그리다 그리다가
숨져 가는 것
가며
빙긋
미소짓는 것
아홉 살 때
새 그림 회벽에
발가락 사이 숯을 끼고
엄마 몰래 그리고 나서
혼자 웃던 그 미소를
손은
느을
노끈에 묶여 있었으니까
바람은 내 머리 위 불고
눈물은 내 뺨을
흐르고
하늘은
저 머얼리서
푸르고
푸르고
새푸르르고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