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고독한 낙서 (몆번째인지 모르겠다)

ivre 2016. 3. 28. 04:37

 

 

 

옛 시대에선 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 안에 간직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밤을 지새워 간곡한 길 편지를 쓰며 지우며 하면서 말이다

마음을 열고 막혀 있던 진실들을 드러냄이란 먼저 그 자신으 영혼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일것이다

구름밭 같은 안개를 뒤로 두르고 한 여자가, 한 남자가 가려진 모든 마음을 헤쳐내 진심의

가얏고를 우려 내고 있다.

먼 길을 와서 이제애 당도한 듯한 그 귀의심 한가닥뿐이다.

거울속에 남겨진 나의 모슴은 어떠한가. 더하여 또 하나의 사람이 함께 떠오름은 더욱 어떤 자태일지.

그와 더불어 한 운명을 둘이 나누고자 원할 때 그 심정 오죽이나 절실한 것이겠는가.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다다르기 위해 먼데서 오랫동안 왔으며 천만 사람 가운데 그를 찾았다고

하겠는데에서야 더 얼마나 간절함 이겠는가.아여 이제는 안주지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고

다시는 아무데도 떠나지 않을 종착지이 확신을 가지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모름직이 이와 같이 희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왠일일까 온 몸에 차오르는건 목마름 뿐이다.

하기야 모든 사랑은 목마름과 더불어 솟ㅇ라나며 마치도 열풍 속에 자라는 선인장과도 같다.

남녀간의 사랑일 땐 더더욱 그 성질이 치열하다.

참 이상도 하다.

모든 여건에서 충족 되고 축복에 감싸인 듯만 싶은 때도 사랑의 당사자에겐 평화가 없다.

모름직이 연애는 실연의 심정을 면치 못하며 갈수혹 더 아쉽고 허기지고 비어 있는 땅만을 바라 보게 된다.

가장 가혹 하고 야만스런 예가 되겠지만 식인종의 어느 부족에선 사랑 하는 사람을 먹어 버리는

일까지고 발생하였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까지도 온전한 충족을 누려 보진 못했을 게 분명하다

소유란 단지 허무한 소멸일 뿐 사랑의 갈증을 푸는 데엔 아득히 못 미치는가 보다.

하면 무엇으로 그 목마름을 고치는가 라로 물어 올텐가.

나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 함께 그 해답을 의논하고 싶어 이 새벽 누구라도 받아줄 이에게 이 글을 쓴다.

헌대에도 "보고싶음" 과 " 긴 편지" 가 있겠는지 묻고 싶다. 손 끝을 움직여 버턴을 누르거나 수첩에

써 넣은 하루치의 사무절차 속에 한 줄의 혹은 한 글자의 약칭으로 비좁게 처리되는 그 사람의 이름.

 

차 한 잔을 나누는 동안에도 몇번씩 시계의 분침을 살피는 인색한 시간 할애. 이런 식으로 돌아 가는

각박한 세태에서도 활활 피어 오르는 보고 싶음의 촛불이 있을까.

그건 행복한 부담쪽이기 보다 고통의 멍에 임이 틀림없는도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있긴 있을꺼다. 칠팔월 불멸의 아스팔트 조치검은 기름으로 녹아 진득거릴때

열 개 그 이상으로 목이 타는 그리움이 사실상 존재함을 믿고 싶다.

여름엔 신마저 잊어 버리게 된다고 누군가 말했듯이 망각과 나태의 거대한 수령을 지나 가면서

한시도 헐겁게도 지닐 도리가 없는 과부담의 격정과 불망을 한아름  그득히 앓고 있가 있다면

그들과 또 의론해 보고 싶다.

아니, 어김없이 그네의 주소를 찾아 배달 되는 우정과 조언의 편지 였으면도 싶다.

되도록 이면 위안과 노크이고 싶으며 최소한 그 염원의 전달 이길 바라고 싶다.

몆백만의 사람이 북적 대는 대도시의 그것도 끓는 용광로 같은 불볕 더위 안에서 한낱 사람 이름의

화인으로 살갖에 문신을 새긴 그를 위하여, 흐르며 또 채워 넘치는 사랑의 수량을 위하여,

그 성실하고 풍요한 인간적 번뇌 앞에 나는 이 글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또한 슈베르트의 "독일 비사곡을" 나직한 볼륨으로 들으면서 말이다.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도시 안 이라고 해서 사람의 본질이 바뀔 순 없을테지.

황량한 시대의 건조한 열풍 속에서도 들꽃을 싶어 기르는 인간성의 녹지대를 믿어야 할 것이며

우리 모두 이 확신의 동지들이 되어야 할것이다.

사람이 받은 공감의 축복이란 귀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오늘은 동네 어르신 집에 가서 어른신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 마음은 흡족 하고 다분히 감미롬기까지 했다

얘기 중에 기쁨이란 단어가 섞이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을 감싸 두르는 부듯한 조명을 느꼈다.

신선하면서 이 말 한마디가 빛의 실타래를 풀어 내는 데에 놀라면서 하나의 싯귀가 떠올랐다.

 

돌아 오라 다리 위에

그 여자 만약 돌아 온다면

나는 말 하리라

아아 기쁘다라고

 

이는 프랑스의 시인 아폴리네르의 글귀다. 그의 생에는 외롭고 가난했으며 심연의 깊은 상처 외에도

머리에 총상을 입어 세번이나 개두 수술을 받는 등 참담한 고통으로 일관되다시피 했었다.

그러기 때문에 위의 시어는 더더구나 비통하고 아름답다.

 

만남은 곧 기쁨이다.

만나기 전에 이미 그가 존재 했다는 눈부심, 그와의 만남이 실현 되었다는 감동 ,여기서 부터 기쁨은

자라기 시작 하는거 아닐까.

하지만 한 그루 묘목이 땅 속에 뿌리 내리기 전에 사나운 기상은 사정없이 엄습한다. 지나치게 가물거나

엄청난 장마가 퍼붓기도 한다. 만나는 시간은 적고 부재의 시간만이 많아 가슴과 목을 마구 감아 죄는

명주 피륙이 되곤한다

너무나 빨리 사랑의 목마름은 와 버리고 그저 암담한 자의식뿐으로 날이 새곤 또 날이 저문다.

그러나 만남을 따라 오는 찬란한 기쁨은 결코 의심 해선 안된다.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아깝잖이 치를

"만남의 축복" 을 진흑에 내 굴릴 순 없지 않은가.

태산 준령의 시련이 가로막더라도 기쁨의 복습만은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특별한 만남과 운명의 사람, 이에 절대의 의미를 부여 하는 이상엔 저절로 연분의 한 전형이 생겨나며

비록 한 연분을 가리고 새로운 연분이 문을 열 때라도 흙 속에 뿌리 내린 나무의 핏줄을 끊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번 돋아난 것의 강건한 근력 위에서만 새로운 관계가 자라도 자랄 것인 바 어떤 여건 아래서도

귀중한 만남들은 깡그리 잊어 지는 일이 생길 수 없다.

봅십시다.

이즘은 과수에는 잘디 잔 과일이 달리고 여린 과육 속엔 훗날의 과일 나무를 약속하는 씨앗들이 깨알처럼

박혀 있다. 사람 속의 능력도 이처럼 오늘을 위한 몫과 후일을 에비하는 비축이 함께 있는거 아니겠는가

 

돌아 보면 사랑에 따라 오는 아픔 따위에 섣부리 겁먹은 나머지 황향한 도시인의 습성을 따라 살만큼만

사랑하였고 떠나도 좋을 만큼만 좋아 했더랬다.

 

사랑의 어려움 중에 가장 어려운건 그 사람의 부재겠지. 사랑 하는 사람끼리 맥없이 헤어지고 마는 까닭인들

함께 있지 못하는 아픔 탓에 그리 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인내 하고 고통을 품 속으로

거두어드리는 근력이야 말로 성인적인 능력 이라고 볼만 한다.

사랑 하는 사람들은 영감과 촉매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런데 이미 그런 사랑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그가 준 것을 잘 가꾸어 꽃피워야 함이 사랑의 과제라 할 때 이 과재와 그의 부재 사이에 사랑의 험준한 계곡은

아득히 솟아 있는 것임을.

그러나 살랑은 그 자체가 행은이며 축복이므로 히여 이에 더 보텔 선물까지 꿈 꾸어선 안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을 가졌으면서 충족과 독점을 더하여 탐내고 언제나 함께 있으려 하며 여기에다 영원 운운의 사치마저

원하는 일은 과욕일것도 같다. 그렇다면 사랑 그 본연의 광채만으로도 족하할 겸허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은 크고 너그러워야 한다. 또한 사랑은 서로를 만들어 준다. 만들어 주면서 만들어 지는 관계 사이의 그

균형에도 애써야 하지 않을까.

내면적 유대, 내적 생명의 성숙한 개화란 그 자신의 최선이면서 관계 사이의 최선도 될것이다.

보고 싶음을 기르는건 어떨까.

사라의 온갖 성실이 배어들어 저 편 이의 내부에 단맛의 양분으로 차오르게 하자. 사랑엔 어차피 편안함은 없으니

안일과 타성의 살을 가르고 고통에 섞여 자라는 생명의 새 넝쿨을 뽑아 내야 하겠다.

가열한 사랑의 명령이 가슴한가운데 떨어져 올 때 조용히 일어서야 한다. 온 마음으로 대답 하면서.......

나도 이제 많이 늙었나 보다 언제 부터인가 조금 긴 글을 쓰면 팔목이 시려 온다. 자판을 두드리기 때문일까

오른손 중지 손까락엔 아직도 굳은 살이 깊게 박혀 있건만 ............간혹은 이 굳은 살에게 미안할때가 있다.

너무 오래 방치해 둔 탓일까. 오늘따라 오른손 중지는 그때의 나임을 잊지 말라고 채찍질 하는것 같은 기분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배도 고프고 졸림기다 하다 지금 시각이 4시 32분.

첫 봄의 햇살이 몸을 풀어주면 구슬 같은 물줄기로 우줄우줄  거리며 조금 마음이 커졌으면 한다.

 

 

 오늘 따라 노래가 왜 이리 좋노

부르며 소주나 한 잔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