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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 / 박형권 / Aconcagua - Ojos Azules (중남미)

물푸레나무/ 박형권 저 나무, 물푸레나무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방 한 칸 내고엽서만한 창문을 내고녹차 물을 끓이면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밤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벽에 귀를 댄다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실로폰 소리 나겠지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끙 끙 끙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그때 창문을 열면?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 곽재구/ 꿈꾸는 사람만이 세상을 가질 수 있지-김원중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 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며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손까락 사이에 낀 아침 / Musa Dieng Kala - Kalamune

들길 너머 양지뜸에 움막 하나 짓고 똘똘한 삽살개 한 놈 데불고 싶다 혹 모르는 손 찾아와도 너는 짖지 말아라 이젠 헛된 목청을 아껴두어야지 뜰 앞의 복사꽃 바람에 흩날리고 불현듯, 묵은 서러움이 목구멍을 간질거릴 땐 이웃집 할머니 텁텁한 농주라도 받아마시자 아아, 취한 세월은 이미 자취도 없어 봄은 또 저 혼자 열렬히 타오르다 사위겠지만 한평생 부치지 못한 편지는 모두 술잔 속에 불사르고 저 꽃 그늘 속 나비떼들의 싱싱한 꿈도 보이는 그런 봄날의 울 밑에 누워보고 싶다 가끔 바람에 꽃잎 하나 찾아와 네 소식을 물으면 그냥, 이렇게 나처럼 살고 있다 하고. 바다가 보이는 허름한 스레트집안에서 나는 이 봄을 그렇게 죽여가고 있다.   어딘가 박혀 있을  습작 중에서.. Musa Dieng Kala - Ka..

사소함에서 찾아 보세요

아마추어 사진가들 특히 "사진동호회" 분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는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멋진 풍경의 사진 맛집? 혹은 특정 시간대의 황홀한 풍경이 있는 장소? 등등... 이런 장소들을 어찌 그리도 잘 알아 내어 고가의 장비 등에 짊어 지고 새벽녘에 길을 나섭니다. 그리곤 마치 군대 사열처럼 쭉 늘어서서 하나 둘 사진기를 꺼내어 세팅을 하고 그 장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일제히 같은 시간에, 같은 조리게값에, 같은 높히에, 같은 장면에 겨냥을 하고 일제히 셔터를 누룹니다.  그리곤 한호 합니다. "햐 오늘 멋진 사진" 한 장 건졌다고, 그런데 어쪄죠? 그 멋진 사진이 나만의 사진이 아니라 그곳에서 찍은 사진중에 한장에 불과 하다는겁니다. 내가 찍은 사진을 그 사진들 속에 넣어서 내가 찍은 사..

멍/ 이정미 / Benito Lertxundi - Askatasunaren Semeei II

이제 대수롭지 않게 넘어기기도 하지만내 몸을 꽉 깨물고 있는 푸른 멍은내가 넘긴 한 장의 달력처럼 가볍거나무거운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생각했는데뽀쪽한 모서리에 부딪혀마음을 다친 적이 수 없이 많았으므로다치지 않으려고 몸 밖의 모서리를몸 안으로 옮겨와 뽀쪽함을 삭여 내느라내 몸이 푸르게 피는 것이겠지다친 마음이 동글어지는 것이겠지,생각도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내 몸에서 피고 지는 푸른 멍을 어루만지며너도 내 몸에다 나의 아픔을 가두기도 했겠다내 뾰족함이 너를 아프게 찔렀을 것이므로내 뾰족함이 삭고 있는 동안너도 아팟겠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서로를 너무 세게 껴안았으므로푸른 멍이 피어나는 것이다,생각해 보는 것이다.

들꽂

주인 없어 좋아라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송이 송이 핍지 않고 무더기로 피어나 넓은 들녘에 지천으로 꽃이니우리들 마음은 마냥 들꽃 이로다 뉘 꽃이 나약하다 하였나 꺾어 보이라 하나를 꺾으면 둘 둘을 꺾으면 셋 셋을 꺽으면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을 간지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어서 사노니 내버려 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들 어떠랴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동전을 뒤집으며 / 김세기 /Club 8 - What Shall We Do Next

Club 8 - What Shall We Do Next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나온다 백원을 뒤집으니 이순신장군 나오고 오십원을 뒤집으니 벼이삭 나온다 멀거니 줄 서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나 훔쳐보며 동전 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서는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신문에 난 연쇄살인사건과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소식을 보며 북녘의 동포들은 끼니를 거른다는데 동전밖에 없는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못난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소리로 못하고 땡볕에 서서 다보탑을 뒤집으니 십원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먼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무엇이든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해서 일없이 동전만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