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의 삶에 밀첩한 관계가 있는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공동 과제를 논하기란 매우 어려운바, 오히려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글 쓴 이에 비해 월등히 생각이 깊고 원숙하여 참으로 안 썼느니만 못한
무용지물이 되는 수가 흔히 있겠다 하겠습니다.
남자의 연애, 여자의 연애란 제목을 부치고 보니 이 역시 누구나의 절실한 사념이요, 보편의 과제임을 절감하고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연애가 현제 부딪치고 있거나 앞으로 결게 될 이 과제 앞에서 잠시 생각을 모으는 한 충실한 벗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의 진수가 사랑인 것과 불교의 헥심이 또한 대자대비임은 너무도 잘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애란 이와 같이 인간 지선이 감정인 사랑이 성을 달리하는 이성을 두고 솟아남을 일러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립고 사무치고 보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 끝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불기둥을 품어 안기에 이르는 불가항력의 갈망.
한 사람의 내부에서 풀어 낼 수 있는 개체의 문제조차 수습이 어려운 때가 많거늘 하물며 상대편 사람과이 상호 작용이 얽혀 있고 더하여 철의 벽처럼 꿇리지 않는 삼자군에 애워 싸였고 보면 여간 곤란한 문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격정과 오뇌에서 헤어나지 못한 젊은이들, 아니 나이를 막론한 모든 랑의 번민에 시달리다 못해 머리를 깍고 중이 되거나,비구니가 되거나, 수녀가 되거나 신부가 되거나 심지어 생명을 내어 던지기까지 하는 처사가 빈번히 일어 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반기를 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래전 선배가 한 말이 생각 납니다. "남성과 여성은 본시 하나씩이였지만 이 두 성이 연애 행위의 방정식을 잡다하여 고금을 통해 무려 억만 가지나 될것이다" 라는 말이였습니다.
연애의 형타내 그 운명성은 다양하며 당사자들의 진실과 필연성의 심도, 그때의 처지, 또한 사회적 윤리적 풍조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겠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축복 받은 상애의 경우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뒤따르는 연애 못지 않개 샂ㅈ과 사람의 축복들 허락받은 귀한 연애를 어떻게 잘 키우 아름답고 값있게 지녀 가는가에 있어서도 애쓰고 인내해야 함에선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에 소흘하면 행복은 깨지고 오히려 가호 없는 사랑보다도 더 죄스럽고 만망한 결과를 가져 온다는것을 아실 겁니다.
흔히 영화나 소설에 슬픈 사랑을 그려내고 있으나 우리의 현실은 다분히 저들 영화나 소설과는 다릅니다. 작품 속에선 요약, 유형화 되고 연극성을 강화시킨 데 비해 우리의 생황에선 단순한 출발과 지루한 전개, 그리고 평이한 결과가 기다릴 뿐이니니까요.
우리는 연애에 사로잡혀 괴로워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으며 이 글을 쓰는 나 역시도 괴로워 하며, 또 괴롭고 외롭고 자멸적으로 사랑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친구나 형제, 어린 학생이거나 문학 청년 이였고, 심지어는 막노동을 하는 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체 자신 있는 판단이나 권면을 해보지 못한 이유는 사랑이 당면해 있는 곤경을 타개할 방책이 어렵다는 그 점 못지 않게 그것을 이룬 후의 충실성, 일관성에 확신이 서지 않던 까닭도 컸을 줄로 압니다.
축복된 연애를 축복 속에 키워 갈 책임과 아울러 고뇌를 치르고 이룩한 연애에 있어서도 그들이 치른 곤욕이나 자타가 입은 피해를 기워 갚고 남을 가치와 행복이 절대로 요구되는 바입니다.
상해의 연인을 가진 이는 태만하기 쉽고 행복에 있어서도 교만이 뒤섞여 불미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명심하고, 모쪼록 겸허와 감사로써 사랑을 가꾸도록 명심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감정 그 밑바닥에는 해아릴 수 없는 모순과 혼란을 갗고 있으며 더우기 불합리의 두 세게가 원만한 합일을 지향해야 할 연애의 어려움이란 형용할 수도 없습니다.
삶의 여러 어려움 중에서 연애의 어려움이 그 중 복잡하기에 상처 입을 가능성도 그만큼 많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필요한 만큼의 체념과 달관도 배워야 하며 어느경우에선 가장 가까이 살고 싶은 이를 가장 먼 자리에 돌려 보내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몸이 가까와야만 마음도 가까워 짐이 아니요, 율체는 멀리 산다 해도 둘의 영혼은 한 가지 이름의 풀을 뜯는 영원한 동향인으로 사는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비의는 무한정이며 어느 하나도 신의 자비가 물뿌리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겠으며, 또 그러한 사랑을 보았기도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마침내 하늘에 통하거늘 사람의 일념이 투철하면 어떤 장벽이라도 꿇어 놓고 마는 그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허니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무모해선 안 되며 독산의 쾌도를 고집함도 허용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가질 수 있는 사람과 가질 수 없는 사람의 구별을 명백히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기혼자를 사랑 하게 되는 경우 혹은 기혼자가 사랑 하게 되는 경우 격정을 이기는 의지가 따라야 겠다는 그 뜻입니다. (이 말엔 사실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도덕을 무시 하기 때문 입니다) 사랑 하고 사랑 받은 일에서 하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심지어는 그 아픔이 죽음에 이르렀는데 실로 이처럼의 불행을 통해 찾아온 몆가지 교훈이 있었다고 할 때 구 중의 한 가지는 인간사의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여겨 봅니다.
기혼자와의 연애 밑 기혼자끼리의 연애는 아무리 순혈한 감정에서 내디딤 했다 해도 제 삼자의 희생이 따르게 될 것이고 보면 자연히 가책과 회오를 낳기 마련이여서 그 비극은 무작정 부풀 밖에 없습니다. 평화를 보장 받지 못하고 양심이 피에 젖은 일일진데 정녕 위태한 바라 하겠습니다.
어째거나 나는 무궁한 고뇌가 따르는 그런 아픈 사랑이 되도록 이 세상에 적게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 참으로 심상치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년 스무사람의 벗을 사귀는 일은 쉬워도 이십년 동안 한 사람의 참된 지기를 지녀 가기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또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그 외형적 양상으로 보아 단잉한 듯 싶어도 일단 마음 속의 끊임없는 갈등을 엿본다면 현기증이 이러날 법도 합니다. 사랑 하는 이는 사랑으로 감싸 저쪽 사람을 영윈토록 사랑스러이 보게 되고 사랑 받는 이는 부딘히 스스로를 키워 쵷량의 반려로서 새로 선택받을 준비를 게을리 안 하는, 그런 아름다운 공부를 해야 겠으며
이 나이쯤에서 이런 말을 다시 하게 됨은 어느 한 여인의 고독한 바라보기를 본 까닭에 또 한 번 공부를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문회인의 무레,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레란 바로 상대편의 기대와 신뢰를 낙망으로 몰아 넣는 일이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날이 가고 환경이 바뀌어지고 시련의 가시밭길을 지나게 될 때일수록 더 슬기롭고 충실한 이가 되어야 가겠기 때문 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보는 눈이나 여성에게 건내는 요구도 전 시대에 비해 많이 달라 졌음을 살필 일입니다. 태평하던 시대의 남성들에겐 여자란 아름답고 유순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에 와서는 지혜롭고 강인하여 근면한 여자, 창조적이고 모성적이며 안식의 터전이 되어도 줄 일을 모두 요구 한다고, 이 시대를 살아 가는 남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백을 할까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또 고백 할것이 있으며 이것을 현시대에 살아 가는 여성들이 간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현 시대의 남성들은 피로하고 고독하여 참으로 합당한 반려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남성이 활력에 넘쳐 있을 때는 여성이 아름답게 존재하는 것으로 족했으나 남성이 지치고 곤혹의 수렁에 빠져든 이상엔 여성이 전에 없이 힘을 내고 위험중에 돕는 전우 같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알량한 남성의 속성 또한 고백 하는 바입니다.
남녀란 상반되는 성질의 이방인이 아니고 따듯한 이웃으로 이해 하고 도우며 살도록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순한 이치를 높히 섬기는 거기에 연애의 본령이 있다고 할 만합니다.
휴, 여전히 손이 시렵고 발이 시렵다.
사랑의 진실이란 사랑의 지속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며 맹세의 진실이란 맹약의 불변을 말하고 있음과도 같습니다. 한 때 눈부시던 사랑도 얼마후에 시들고 만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모든 일에서 항상 영원하기를 희구 하는데에 사람의 연약함과 그 이념을 찾아 보게 합니다.
"사람은 사랑이고 죽는 일만으로 불충분하여 사랑하고 죄를 짓고 그 다음에 죽는다" 라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듯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그 좌절이 사랑의 죄가 되고 그 패배가 됩니다. 다른 일면에서 볼 때 사랑의 영원이란 너무나도 난업임이 사실이나 아무쪼록 영원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끝까지 분발 해야 하겠습니다.
불변해야만이 사랑도 비로서 참 생명의 명백을 갖추는 바 될 것입니다. 사랑하던 이를 미워 하게 되는 일은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설혹 배신을 입었거나 용서 못할 모멸의 추억을 가졌다 해도 한 때 사랑 했던 사람에 대하여 미음을 갖는 일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 아는 말 중에 "사랑은 인내와 용서를 요구한다고, 우리는 분명 이 지혜를 읽어 냅니다.
연애의 원칙으로 분명 결혼에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연애따로, 결혼 따로의 식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고 논리 정연하게 주장함을 듣기도 했으나 납득 하기가 어렵습니다. 결혼이란 함께 사는 일의 공인이라 하겠거니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평범한면서 가장 좋은 것의 양식을 버리곤 달리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이상엔 얀애가 결혼으로 귀착되어 마땅하고, 도저히 결혼 할 수 없는 연애만이 가정의 성곽 밖에서 부득이 서러운 야영을 하게 됩니다.
사르트르와 보봐르 부인과의 사이같이 새로운 생활 영태로 생겨 날 수 있다 한들 나의 관념으로써는 결혼을 부인하는 일체의 연애를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잼있는건 결혼을 목적으로 사랑을 한들 그 본래의 목적이 퇴색 되어 그져 몸과 몸의 이야기에 열중 하게 되는 변질 되어 결혼에 다다르는 사랑도 왜 이렇게 흔치 않은 겁니까. 나부터 말입니다). 권태를 미리 겁낸다거나 연애의 회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라는 따위의 어설픈 말거리엔 그저 민망스럽기만 합니다.
사람은 고독합니다.
사랑을 품고 있거나 사랑을 모르는 이나 간에 이 점에선 마찬가지요,결혼을 했거나 안 한 이도 고독의 원리에선 벗어나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갖거나 결혼을 하는 일도 인간 본연의 고독의 해소 여부와는 무관함. 인정 하고 싶진 않지만 이로써 자명하다 하겠습니다. 사랑은 그저 무상의 관념이며, 고단한 영광임을 잊지 말 일 입니다.
연애엔 이성의 참가가 없지 못합니다.
이성이란 차갑고 가차없는 것으로 여겨지길 잘 하자만, 뜨겁고 풍성한 이성인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성은 감성이 맹목일 적에 그 밝은 눈이 되고 감성이 순간만을 볼 때 긴 시간을 생각 하도록 도와 줍니다. 이성의 목소리를 피해 가는 연애는 모래 위에 집을 세우고 종이로 지붕을 만들기 쉽습니다. 이성은 지혜롭고자 하는 이들의 굳센 기둥 입니다.이지의 발언을 귀답아 듣는다기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앞질러 발굴 하려는 심성이 되어 여기에 사랑을 담고 싶다고 하면 허울좋은 공론이라 이르겠습니까?
사랑은 사람의 아름다운 능력이요, 동시에 슬픈 능력입니다. 사랑에 있어서의 그 처신은 각기 사람마다의 운명과 필연성이 얼마만큼 질기고 불가피한가에 따라 책정 되어 나옵니다. 스승이나 선배의 말이 귀한 약재처럼 쓰일만 할 때라도 이를 내버리고 오뇌의 계곡을 헤맬 때도 있습니다. 오직 사랑을 하고 있는 당사자의 양삼과 간망이 하나의 우주와도 바꾸지 못할 신조를 품고 한없이 유랑 하는 방황. 더우기 여성에겐 사랑이 순교가 되기까지 하거늘 마치도 생명에 염색을 하는 짙은 물감과도 같이 한 번 사랑에 적셔지면 그 빛깔 영 지울길 없음을 알고 있고, 보았음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연애는 인생의 전부 같은 착각을 주기 때문에 연애로 피 흘리는 여성은 그녀의 사랑이 온통 피범벅이가 되기도 하지만 연애는 삶의 한 부분이요, 귀중한 부분이므로 하여 우리의 삶에는 연애도 소중하고 연애 외에도 귀중한 사명과 가치가 있음을 유념 해야 되겠습니다.
끝으로 시 한 소절을 적으며 이 글을 맺을까 합니다.
대낯에도 내 마음엔 별이 안 뜨고
날 저물어 등붕 켜도 위안은 없네
나에게 남은 꼭 한 가지 기쁨은
상냥스런 그대 모습 되새기는 일.
괴태의 시 인데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늘 그렇지만 오타가 많이 있더라도 그 뜻이 퇴색 되지 않는다면 고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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