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황인숙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生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