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77

변절의 구실

지난 세월 .. 사실 너무나 까마득해 기억도 가물가물한 생대구의 뿔다구 같은 심해의 추억들이 이젠 퇴행성 추억질환의로 조금씩 나의 세상에서 살아지려고 하는 지금의 내 생활. 난 다시 탄광촌에서 입었던 땀에찌든 작업복을 생각해 본다. 언제나 탄먼지로 무장을한 막장 안에서 공차를 끌고 돌아오던 그들의 등에는 동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날카로운 삶의 처절함을 오후 날선 햇빛을 받아 마치 중세의 전투복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 그 작업복 아크레의 살육을 금방이라도 끝마친 듯한 알수 없는 비린내를 동반하며 그들은 매일 새벽마다 중새의 까마득한 막장안에서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시민군들이엿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 처절하게 벌이는 전쟁만큼 일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 목숨을 걸고 막장에 들어가 돈푼이..

새벽과 시작은 동의어이다.

심산의 유곡에서 허덕이며 육체도,정신도 만진창이가 되어 지내온지도 근 한달이 되어간다. 왜, 나도 모른다. 아주 오래간만에 글 한 줄 써 보려고 술 한잔을 빌려 의자에 앉았다. 감성이란 놈이 절실 해서 이다. 무얷을 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로 써 내려 가 볼까 한다. 시작의 의미는 새벽의 의미와 동일 하다. 밥중에라도 결정 짓고 즉시 시작 한다면 그것은 홰를 치는 첫새벽 되는 것이다. 정년 그건 새벽이다. 무더운 여름밤, 잠도 설치고 번민의 늪에서 허위적 거리던 내 육신이 땀에 젖어 긴 머리채를 냉수에 감아 행구고 손을 모아 태초이 할배와 할미에게 기도 드린다면 필시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소망과 결정을 들어 올린다면 그또한 푸드득거리는 날개짓으로 여명의 하늘을 날아 오..

세월을 모두 긴 통로처럼 등 뒤에 깔고

지내온 새월을 모두 긴 통로처럼 등 뒤에 깔고 길 위에 드문 드문 가로수 늘어서 듯 회상의 표말 늘어선 여기 나는 말의 화사한 날개를 벗고 소박한 촌빨 날리는 사내가 되어 글을 쓰려한다 더 단순하게 되고 될 수만 있다면 갓 생겨난 사내아이처럼 되는게 나의 소원이다. 이적을 꿈꾸거나 턱없이 큰 가치를 부러워하는 일에는 켤코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갖진 못했어도 영 굶주림 모른다면 그로써 족할것을 하기사 어떤 사람이 내게 그랬다. "고독하지 않으면 글이 나올 수 없다" 내게 고독이 있다면 내 어찌 가난하다 이르리. 밤 글을 쓰느라 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앉기 전에 커피를 갈아 내려 진하게 한 잔 가득 만들어 커피 향을 흡입 하며 행복감에 젖어 보자는 심사 였다. 약간은 성공한듯 하다. 피로..

연애

모든 이의 삶에 밀첩한 관계가 있는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공동 과제를 논하기란 매우 어려운바, 오히려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글 쓴 이에 비해 월등히 생각이 깊고 원숙하여 참으로 안 썼느니만 못한 무용지물이 되는 수가 흔히 있겠다 하겠습니다. 남자의 연애, 여자의 연애란 제목을 부치고 보니 이 역시 누구나의 절실한 사념이요, 보편의 과제임을 절감하고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연애가 현제 부딪치고 있거나 앞으로 결게 될 이 과제 앞에서 잠시 생각을 모으는 한 충실한 벗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의 진수가 사랑인 것과 불교의 헥심이 또한 대자대비임은 너무도 잘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애란 이와 같이 인간 지선이 감정인 사랑이 성을 달리하는 이성을 두고 솟아남을 일러 ..

건드려 본다.

부르조아틱하게 원두 커피를 갈아 진하게 한 잔 내려 내 건조하고 칙칙힌 혀를 자극 시켜 본다. 달콤한 타액 보다는 못하나, 씁씁한 담배 니코틴 보다는 자극적이다 오래간만에 앉아 이렇게 글 걸음마를 시켜 본다. 하나,둘.셋,셋,다서엇 문득 이런 말이 생각난다. "독은 아름답고 죄는 달갑다" 는 말이 있다. 겨울도 꽤 깊어지면 확실히 무언가가 움츠려든다. 학교 난로 옆이나 온돌방 아랫목 자리잡고 앉으면 일체의 거동이 싫어진다. 얼굴이 불그레 익도록 몸이 더워지고 연방 눈 감기는 조름끼기 눈섭 끝을 간지르면 실상 예서 더할 수 없으리만치의 달디 단 안식에 잠겨든다. 서성이던 마음도 가라 앉고 어지간한 근심 쯤 꽤 잊고 살것 같다. 애환에서 달려 긴 불면으로 지새던 일쯤은 어리디 어린 날의 아슬한 기억과도 같아..

네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노래6

이 집에는 귀가 어두운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고 집은 그야 말로 바람이 조금만 불면 쓰러질듯 외줄을 타는 곡예사의 긴장감을 엿볼 수 있는 집이였다. 그 할머니를 저 중간쯤으로 꾜셔와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당신이 찍히는걸 무척이나 싫어 하셨다.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 나 이외의 사람이 와서 사진을 찍으며 그 할머니에게 불쾌한 짓을 한걸까 혹은 애초부터 사진 찍히는것에 거부감을 같고 계신 분이셨을까.(아직도 그게 의문이다) 결국 할머니를 내가 원하는 장소로 모셔 오지도 못했거니와 그 분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집안 곳곳을 찍는건 허락해 주셨다. 앞으로 오래 오래 저 집과 함께 저 모습으로 게셔 줬으면 하는 소망을 뒤로 하고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감사 합니다" 인사를 하니 손을 흔들어 주셨다..

세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노래5

나는 누구란 말인가. 진시로 내 삶에서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당신의 누구인가? 겨우내 내 시력이 건강했었나를 돌이켜 생각한다. 잃은 사람이나 새로 얻은 사람이 있었는가? 닫혀진 문 앞에서 나직이 내가 노크 했었나? 그랬는데 열리지 않았었나? 내 감정은 매우 가라 앉았다. 자구 밑바닥으로 처져 내려 생사의 결단 보다도 더 가파롭게 쳐져 내려 정녕 바닥에까지 침잠한 것이다. 한 덩이의 석탄이다. 하나 속속들이 기름이 부글 거리고, 불을 댕겨 붙이면 삽시에 펄럭이는 화염이 또 된다. 왜 괴로와야 하나? 무엇을? 그 흔하고 오랜 습성, 명제도 불투명한 번민은 자못 이성의 오욕이라 하겠는걸. 하면 그동안 무엇을 번민했었나를 말해보라. 말해보라. 그리고 또한 사랑 했었나? 아슴한 옛날, 이름도 저승인 그 전세..

원소리

사람들은 뭘 하고 있나?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모든 이가 목소리를 합쳐 소리 지른다. 바르고 자유롭게 살자고 한다. 윤택하고 따습게 살자고들 한다. 그야 인권의 발언이지. 겨우내 자기 땅의 역사를 묵상 하던 지금 신선한 늦봄 천지를 맞았다.봄의 상명한 기운이 꽃의 담향과 섞여 솜실 같이 풀어진다. 우유라거나 또는 비누거품, 공기가 부드러워 못 견디겠다. 그렇구나. 쓸쓸한 자연 곁에 내가 엎뎌 있었다. 아무리 퍼내도 삽시에 또 괴는 샘물, 무량한 상념을 소의 위장처럼 느리게 반추 하고 있었지. 자연은 언제나 놀라움의 장이다. 괭장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놀래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놀라움에 적쟎이 굶주려 왔구나.

휴식,그리고 신망.

오랜만에 글을 써 보자고 자리에 앉아 본다. 저 셔츠는 여름이면 어김 없어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몸뚱아리를 가려 주는 가리개다. 옷걸이에 걸려 한줄기 빛을 받고 있는 셔츠에 내 눈길이 머문다. 무엇때문일까. 무엇이건 쉽사리 얻는 듯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땐 냉엄한 거부 앞에 춥게 세워진 나 자신을 본 걸까? 처음엔 이럴 수거 없다고 여기며 주먹으로 문을 두드린다. 가슴으로 떠밀어 보고 다시 머리를 부딪는다. 실오라기 보다도 가늘고 긴 유혈. 이건 열리지 않는 문이다. 비로소 그 실감이 전신에 퍼져돈다. 불시에 입은 총상처럼 어이 없다. 날이 저문다 빌어먹을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는 연지빛 놀이, 분결 같은 하늘에 선훙을 함빡 물들인 하늘은 볼 길이 없다 내가 볼 수 있는 하늘 이라곤 희쁘연 먼지와 매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