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낙서도 감정노동이다 78

선택, 그 끝없는 딜레마

요 몇일 내가 느끼고,듣고,바라본것은 바람과, 감나무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반항 하는 비닐조각의 소리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무수히 지나가는 자동차소리와, 삐그덕 거리며 흔들리는 페가 방안의 그들에 딜레마를 본것이 전부이다. 우숩게도 그 페가 앞마당엔 곱게 심어 놓은 마늘이 주인이 떠난지도 모른채 열심히 숨쉬고 있었다는거다. 오랜만에 내 여린 감상의 창문이 열린걸까. 바위를 가르고 솟는 한 줄기 단 샘처럼 세월의 이끼를 털어내고 모가지를 뽑아 올리는 젊은 초록들이 있다. 그 전날 슬픔의 음미마저 달갑고 화사하던 젊은 시절의 땀과 하늘과 그 기후가 돌아왔단 말인가. 나른한 두 팔을 길게 펴고 그 위에 땀에 젖은 얼굴을 얹어 잠시 꽃그늘에 쉬어 가고 싶은 이 늙은 사내, 어져면 저 방안의 모습은 내..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5

아직 추위가 남아 글을 쓰려면 이 사내의 허리와 손이 시렵다. 언젠가 이런 글을 긁적 인적이 있다.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줄 지금 세상의 여자들, 그럼에도 신이 한가지만을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 여자를 갖겠다. 지헤로운 한 여자를 물은 물에 합치고 불은 불과 섞이면 더 타오른다지. 생명이 은성해 지는 징후, 더 자라고 더 너그러워지고 더 밝아 진다면 주위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여러 일거리, 전부의 자연물까지도 한결 뜨겁게 껴 안을 수 있고 갑절의 충실로서 베풀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어느날 한 사내가 두 팔을 벌리고 겨울 바람에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이 더 많은 산으로 가는걸 보았다. 마치도 그 몸 시늉은 바람을 안아주려 가는것 같았었다. 그래 산에 바람이 많지. ..

습관처럼 비현실의 도취를 만들어 꿈꾸기를 좋아 하는 나.

죄송했습니다. 많이 굶주렸기에 그 허기에서 광란에 붙잡혔습니다. 오늘은 괜찮습니다. 바다에까지 나갔다 왔는걸요. 헌데 고요 하고, 속으로 찾아든 외롬은 아무 소리도 울려 내지 않고 울려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그 놈의 독백. 푸른 소주병 하나에 위안을 받으며 소줏잔과 이내 히히덕 거리며 어느새 독백은 주정으로 전락한다. 한 때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던 저 배가 지금은 한낯 쓰레기로 전락 하듯 말이다. 까닭없이 눈을 적신다. 감상과잉일까? 아님 미숙아라고 맥없이 자처해 버릴까? 자학에 대하여도 생각해 본다. 이 일이 자학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물어 본다. 이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삭풍속에, 머릿속은 불붙고 가슴은 얼어든다. 그놈 속의 반은 가울이고 반은 늘 봄이다 밤낮으로 낙엽이 지며 언..

생명의 斜線

돌이커 보면 정녕코 부조리의 사태뿐 우선 사람에겐 정신의 기갈보다 육체의 기갈이 한결 더 절박하며, 슬픔보다 오욕이, 오욕보다 한치 절박한 공포가, 더 강하고 몸서리쳐진다고 할 때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당신들은 그 어느쪽의 죄석에 있었는가. 내 육체는 여직껏 굷주린 일이 없다. 공복과 기갈이 그리고 혼란의 나라, 삼순구식(三旬九食) 이란 말 마저도 흔하게 쓰여 온 나라에서 내 육체는 내 육체는 한번도 굶주린 일이 없다. 내 정신도 촌각이 가파로운 불안의 밑바닥에 끌려 다니며 수모와 저항에 참담히 뇌수를 자극한 일이 없어 왔었다. 나는 삶의 준령을 모르는 사람이다. 내게 닥처온 곤혹이란 고작 감정의 용량을 흔들었던 그것이고 거기따라 높은 소리의, 얼마간 과장된 절규를 자아낸 데에 불과했었다. 반이 ..

빛과 노래와 그리고 소망 (거제도 여차에서)

어수선 하고 지리하고 그 시간이 너무 길다고 여겨진다. 인생이 또한 엄청난 누적물이라 싶어 압도될듯 놀라 버리곤 한다. 사는걸 겁내는 것도 아니건만 견딜 수 없는 공포를 삶의 그 살 냄새나는 가슴에서 때때로 느겨내는 버릇이 있다. 회의 하는것 부인하는 것만도 아니며 철학자와 같이 사색과 자성의 와중 깊이 들어가려고도 아니한다. 감상 따위야 본시 나에게 많았었지만 이젠 그것조차 거의 써 버렸다고 자처하는 이즈음에 왜 이리 손톱끝에 불이 당겨진듯 나는 목이 탈까. 문득 저 포말을 그리며 여에 자기 몸을 부딛히며 소리를 지르는 저 파도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다. 서늘한 포말 속 깊히 내 반신을 박아 놓고 우설조차 함께 견딘다면 어떨까. 낯익은 권태, 한 잔에 술 결국 내가 본건 건조한 소리였다.

머나먼 데서 오는 새벽에게 고하는 말 (음악 (Celtic Graces - A Best of Ireland..중에서)

새벽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들은 새벽을 기다린다. 먼데서 오는 새벽을 만나려고 그 모습이 잘 보이는 산등성이에 오른다. 물먹인 빳빳한 새 옷을 입고 새벽은 오나? 청모시 도포를 입고 새벽은 오나? 새벽을 기다리며 긴 밤 내내 새벽의 생각에만 골몰할 때도 있다. 새벽이 오리라고 믿으므로 하여 밤의 살결에 이슥토록 손을 얹기도 한다. 진맥하는 늙은 노스님과도 같이. 새벽이 오면 모든 갈증이 풀릴까?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단 샘물이 될까? 막혔던것 모두 이어지고 주름잡힌 남루들도 인두로 편듯이 고쳐져서 재생 될까? 그러나 새벽은 밤의 끄트머리에 이어진것, 밤의 무궁한 심연, 밤의 역사와 고뇌를 다 러 갚아야만이 그것과 만날 수 있다. 바깥을 내다보면 안개 먼저 자욱이 서려 있다. 희쁘연 여명이 벌써 와서 우리의..

땅속에 밖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채 말라가는 ....

나는 죽었다고 생각 하자. 죽은 목숨이 어느동안 그 전에 살던 삶을 이어 산다고 생각 하자. 죽은 일의 절차를 생략하고 몇 사람의 가슴은 슬픔이 괴기도 할 그런 송구스런 수속도 손쉽게 거쳐 버렸다고 생각하자. 그 때문에 이런 일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좀더 살아 볼 일이다. 우선 오늘 하루 더 살아 볼 일이다. 아아 몇시간 동안만 내 마음을 수습 한다면 앞으로 참 오래 살 수 있을것 같다. 누군가 아주 조금만 나를 붙들어 준다면 저 땅속에 밖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채 말라 가는 저 기둥처럼 되지는 않을텐데. 오늘도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광대의 이야기6

태초의 할매여, 슬픔이 투명 하려면, 종소리 맑디 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몇천만번을 더 사람도 울고 종도 소리 질려야 하는 겁니까. 내가 배운 말중에 넘치는건 수식어요, 모자라는건 확신한 결단의 어휘뿐이였던 것입니까. 고백하건데 이제것 내 머리속의 글들은 지나친 형용사 따위로 가면을 쓰고, 드넓은 바다를 손톱만한 돛 하나 달고 항해 하는 꼴 이였습니다. 이전에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바의 사상의 크기보다 좀더 상황을 부풀려 나타내는 해픈 말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론 또 반대로 제 사념을 다 드러내기에 말의 상식이 엄청나게 달린다고 절감하곤 했습니다. 하면, 어느쪽이 얼마만큼의나 더 어설푼 것이겠습니까. 사실로 말해 남들이 제게 대해 아는 것보다 실지의 저는 더우기나 어리석습니다. 나태하고, 축축..

무룻 따뜻한 것이 그리워 옴이 겨울 아니랴.

무릇 따뜻한 것이 겨울 아니랴. 튀겨 오르는 화염은 느닷없는 겨울의 노래임을. 가랑잎을 지피던 땍도 이미 지나갔다. 투박스런 석탄덩이를 던져 검은 유지를 뿜으며 지글지글 타오르는 야성의 불더미를 애워싸고 돌아들 앉을 때다. 가슴속에 주홍의 꽃망을이 돋아나듯 한편 괴이하고 한편 격렬한 감동이 치민다. 흡사 표효하는 불바다를 머금은듯 하다. 도시, 용서없이 진실한 것에 불을 따를 만한 것이 다시 있을까.참을 수 없는 동경이 마침내 더 참지 못하는 한 뜨거운 묵언의 고발을 제시하며 나서듯, 그것은 부드러운 담대와 현요한 몽환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무슨 짓궂은 모순이랴 불을 바라보고 있는 때일수록 더 한결 마음이 추워 오는 것임을. 불을 보고 있을 때면 오히려 낙엽에 뒤덥힌 광야의, 그나마 일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