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몽상가의 잠꼬대 996

송재학/공중 (문학동네2009년 겨울호 중에서)

Veronika Dolina - Мой дом летает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겨울날 단장(斷章) - 황동규

Tanja Solnik - Numi Numi1 좀 늦었을 뿐이다, 좀 늦었을 뿐이다, 나의 뼈는 제멋대로 걸어가고.  차가운 얼굴을 들면 나무들은 이미 그들의 폭을 모두 지워버려,  폭이 지워지면 앙상히 드러나는 날들, 내 그를 모를 리 없건만,  오 모를 리 없건만, 외로운 때면 언제나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제 누가 나의 자리에 온다고 하면, 보리라, 각각으로 떨어지는 해를,  어둑한 나무들을, 그 앞에 그대를 향해 두 팔 벌린 사내를, 그의 눈에  잠잠히 드는 지평을, 그리고 그의 웃음을, 그대는 보리라. 2 어두운 겨울날 얼음은  그 얼음장의 두께만큼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은 오랫동안 나를 버려두었다.  때로 누웠다가 일어나  겨울저녁 하얀 입김을 날리며 문을 열 때면  갑자기 내 입김 속에 들..

검은 겨울 / 이경임

Silje Vige - Adle E Allenina 너는 먼지들과 신발들과 책들,  참새와 아이들과 금붕어들, 그리고  웅덩이 같은 것들과 함께 늙어간다.  때로 잡동사니 추억들이 벌이는 연극에  초대받는, 그런 특별한 저녁이 오면,  한없이 낡고 우울한 내 머리 속 화원에서  너는 며칠 후면 시들어버릴  검은 장미송이들을 고른다.  흘러가 버린 시간들 속에 각인된 악몽 때문에,  그럴 때면 너는,  가까스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시간이 네 몸 속에 파놓은 구덩이들을  들여다본다, 마치 몸만 사람으로 환생한 지렁이가  전생의 기억들 속에서 어둠을 파고들 듯이,  너는 구덩이들 속으로 빨려들 듯하다.  다시는 환한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겠다는 듯, 너는  아늑한 구덩이들 속으로 뛰어내릴 듯하다.  산..

거리가 생겼다 / 이봉학

Waterfall Cucurrucucu Paloma - Caetano Veloso흐리고 우울한 날이어서 활짝, 달맞이꽃밭에 노랑나비 멈칫멈칫 금방 피어난 듯 꽃잎인 듯 달라붙는다 문득 노란 것들과 나 사이 꽃잎인지 나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거리가 생겨난다 떠나는 길과 머무는 집이 묶였다가 풀어지고 걱정과 환희가 함께 버무려지는 거리 한 걸음 집 쪽으로 물러서면 먼 남의 일이 되지만 한 발짝 길 쪽으로 다가가면 활활 애가 타는 거리 그 거리가 있어 나 견딜 수 있네 그리움이 꽃피는 거기 그 거리 그쯤에 놓여진 내 애달픈 사랑

서럽고 서러운/김지하

Franco Simone - Al Tramonto  유년의 한때 아빠는 도망다니고 엄마는 아빠를 찾아 전국을 헤매고 나는 고향을 좋아하고 마당의 작은 꽃을 좋아하던 나는 끌려다니며 끝없는 멀미에 시달리고 그래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랬지 그러나 나의 여로는 끝이 없었지 할머니가 한때 넌 나랑 함께 살자 해도 난 그럴 수는 없었고 끝없이 끝없이 터지는 데모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누르는 테러에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경찰서에서 아빠는 맞아 들려 나오고 엄마는 되레 외가로 달아나버리고 나 혼자 빈 마당에서 새를 그렸다 새 그림 바람과 눈물 나는 그림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그림을 못 그리게 그림 그리면 배고프다고 못 그리게 내 손을 이어서 숯을 끼고 그리는 ..

바람의 등을 보았다 / (바람의 등을 보았다/창비) 김윤배

Akejandro Filio & Leon Gieco - Un Precio 모든 지명은 바람의 영토였다한 지명이 쓸쓸한 모습으로 낡아 가거나 새롭게 태어 난다 하더라도 세상의 지명은 바람의 품 안에 있었다지명은 바람의 방향으로 생명의 길을 갔다비람이 가소 싶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바람의 등이였다바람의 등은 바람의 영토가 아니였다 몸이였다 몸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바람의 들은 온갖 지명에 긁혀 상처투성이였다바람의 등은 상처 아무는 신음소리로 펄럭였다나는 내 등능 보지 못했다 등은 쓸쓸히 낡아갔을 것이고 홀로 불밝혀 기다렸을 것이다 내 몸의 오지 였던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슬픔으로 출렁이던 기억이 있다펄럭이지 않던 등,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던 등으로 꽂히던 말의 화살이 있었고등을 타고 넘..